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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포은 선생의 행적 (5번까지 답변)
작성자玄逸()작성일2013-07-31조회수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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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종친회의 의견이 아닌, 개인 의견입니다. 아마 종친회에서 이런 질문 하나 하나에 공식 입장을 내놓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새는 인터넷이 발달했기 때문에 종친이라고 해서 역사에 더 정통하거나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 하는 비밀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는 오히려 후손이라는 점이 단점으로 작용해서 근거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 과장 윤색하거나 함부로 조상을 비판하지 못 하고 나쁜 점을 숨기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학 전공자의 전문적인 학술 연구를 종친회에 바라시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질문자께서 자세하고도 성의 있는 질문을 하셨기 때문에 개인 자격으로 나름대로 답변을 해보겠습니다. 질문을 쪼개서 등록해주시면 답변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 질문이 너무 길고 많아서 나머지는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틀린 내용이 있을 수도 있고, 사실에 입각한 반박과 토론은 환영합니다. 1. 우왕, 창왕의 폐위에 정몽주가 가담했다는 얘기는 거짓일까? 정몽주가 폐가입진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자께서는 이성계 측이 포은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제기하셨는데,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추측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왕의 폐위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위험 부담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일 처리를 하기 위해서 우왕,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명분을 쌓고 어떤 지지기반을 더 확고히 하는 보험의 성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신돈의 아들이라는 의심을 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누구의 소생인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폐위를 주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력이 쇠하며 대외관계에서 또 국내정치에서 내우외환이 생기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해보려는 개혁을 시도했다고 평가하면 어떨까요? 포은선생은 큰 뜻을 중시했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지만 임금을 폐위하고서라도 고려라는 나라를 바로세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2. 조선왕조가 포은집의 편찬에 참여했는가? 네. 조선 임금이 문집 간행을 명한 적이 있습니다. 왕조실록 검색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데다가, 포은집 첫머리에도 적혀 있습니다. 만약 임금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문집 편찬에 당대 실력자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글 쓴 분의 생각처럼 모종의 유리한 방향으로 서술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으나, 포은집의 내용 가운데 타인의 저작이 아닌 포은의 저술인 부분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포은의 시문을 고친다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일 뿐만 아니라 술이부작의 원칙에도 어긋나는데 과연 유학자들이 그런 일을 했을까요? 윤색이 의심된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분께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물증이 있다면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정몽주는 외교길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을까? 백산학보에 실린 해당 논문을 대강 살펴봤는데 그 분의 주장도 일리는 있으나 근거가 단편적이네요. 사행길에 잠깐 시름에 잠겨서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시를 쓸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회의와 좌절의 연속이었다]라는 둥 해석을 붙이는 것이 확증적인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했는지 싫어했는지와 같은 내면적인 부분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정답이 없다고 봅니다. 4. 정몽주는 이인임 등 실력자에게 아부했는가? 먼저 위키백과의 내용에 틀린 점도 많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일일이 지적하기는 곤란하지만 예를 들자면 정운관의 다른 이름이 정거민이라는 기술은 엉터리이지요. 그래서 어떤 해석을 볼 때는 원천사료를 확인하면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정몽주가 이인임 등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고려사절요에 있는데, 해당 원문을 확인해보면 이인임 등에게 잔치를 베푼 것이 아니라 국가 원로(耆老)가 참석하는 연회를 연 것입니다. 아마 공식적인 자리였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정적이라고 해서 배제했다면 오히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 하는 소인의 모습을 보였다면서 비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아부이지만 좋게 말하면 원대한 포용심이라고 볼 수도 있고, 어느 한 쪽으로만 생각하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인임은 어떤 인물인가 말씀하셨는데 말학이어서 감히 이인임을 평가하기는 곤란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관찬사서에 많은 비중을 둡니다. 려사, 실록만큼 꼼꼼하고 정확한 사료가 없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윤색이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사실 자체의 허위 조작의 가능성은 드물다고 봅니다. 그래서 기록된 사실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독자의 몫이 되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건전하게 토론을 해나가면 되는 것이지요.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불과 백 년도 지나지 않은 전직 대한민국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지 않습니까? 시대 상황에 따라서 평가는 늘 변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부분을 인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5. 정몽주는 최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성계 일파를 왜 미리 견제하지 않았을까? 질문자님께서 말씀하신 이성계 전기에 나오는 일화는 저자의 각색일 가능성이 큽니다.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아직 확인을 못 했는데, 혹시 사료를 발견하면 알려주세요. 말씀하셨듯이 정몽주와 최영은 친명파와 친원파로 대립하고 있었고 또 최영은 개혁적인 이성계와 달리 기존 무신정권에 충성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이성계를 저지하기 위해서 정몽주가 최영을 구명해야 하지 않았겠느냐고 말씀하셨는데, 아마 정몽주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국충정심으로 이성계를 잘 설득해서 고려를 개혁하고 다시 나라를 어떻게 잘 운영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성계가 언제부터 결심을 했는지 분명하지도 않고요. 나중에 서로 다른 정치노선을 밟았지만 이성계와 정몽주는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 이성계 일파를 유배보냄으로써 항의의 표시를 하였으나 이 때는 시기가 너무 늦었던 것이고 이성계도 정몽주의 뜻을 잘 알았지만 자신의 생각으로는 역성혁명을 안 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일 마음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이방원이 일을 벌인 것을 알고는 진노해서 앓아누울 정도였습니다. 포은선생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세상이 흘러가는 상황을 알면서도 동지 사이의 우정과 백성을 생각하는 큰 뜻 그리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뒤섞인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객의 손에 최후를 맞게 된 것으로 짐작합니다. 역사에 가정을 넣어서 상상해보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한 개인에게 있어 만만한 시대상황이 아니었고, 비록 바람을 성취하지는 못 했다손 치더라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며 역사적 소임은 다 했다고 봅니다. 나머지 답변은 다음에 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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