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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6번부터 10번까지 답변
작성자玄逸()작성일2013-08-03조회수1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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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답변입니다. 6. 정몽주가 요동 공격 음모를 꾸몄다는 해동역사의 기록은 무엇일까?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국내 기록이 우선입니다. 사승고오의 기록은 조선이 명나라에 보고하는 목적에서 쓴 글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저는 질문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왜곡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우현보를 현우보라고 쓰는 부정확한 모습도 보여주네요.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이미 아시다시피 친명사대주의 정책을 편 게 맞다고 보고요, 잘 아시겠지만 사대주의가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신 살해 때문에 명나라와 전쟁이 일어날 뻔도 했는데 잘 무마하기도 하는 등 기본적으로는 친명사대주의 정책을 폈지만 왜국에 가서 포로를 데려오기도 하면서 실리를 추구했습니다. 7. 정몽주의 최후를 다루는 이야기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윤승준 저 포은 설화의 전승 현황과 그 유형이라는 논문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말을 거꾸로 탔다는 이야기는 말씀하신 대로 출처가 확인이 안 됩니다. 근래에 민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를 보면 포은 정몽주가 매헌 권우(1363~1419)에게 빨리 떠나라고 화냈다는 이야기가 있어 죽음을 알았음을 암시하고 있고, 성해응의 연경재전집을 보면 녹사에게 재삼 따라오지 말라고 하였으나 결국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개성 선죽교에 18세기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 포은녹사기실비, 포은녹사순의비가 있습니다. 하여가와 단심가는 포은집 초간본에는 없던 것으로 나중에 첨가되었는데 지금까지 문헌으로 확인된 것 중에서 가장 앞선 것은 심광세의 해동악부에 실린 것입니다. 하여가와 단심가를 인용하고 있는 문헌들 중 일부 목록. 간이집(1631, 최립:1539_1612) 졸옹집(1634, 홍성민:1536~1594) 해동악부(1617, 심광세: 1577~1624) 약천집(1723, 남구만: 1629-1711) 원교집(?, 이광사:1705~1777) 약산만고(1924, 오광운:1689~1745) 신재집(?, 이영익:1740~?) 매산집(1866, 홍직필:1776~1852) 운석유고(1868 , 조인영(1782~1850) 연경재전집(1840?, 성해응: 1760~1839) 나산집(1859, 조유선:1731~1809) 임하필기(1871,이유원:1814~1888) 8. 정몽주는 여성을 차별하는 법을 만들었을까? 신율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고려사 열전에 나오는 것이고요, 시행되지는 못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율 내용은 현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생과 풍악쟁이와 결혼하는 자는 곤장 80대를 때리고 벼슬에 임용되는 것을 막는다라는 이야기를 어디서 본 것인지 출처를 정확히 알려주시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율은 정몽주가 대명률과 지정조격을 참고하여 만든 사찬법률서로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주도적으로 만든 것이 맞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여성 하대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임진왜란 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임란 전 분재기를 보면 여성도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 받는 기록이 있고, 제사 기록에서 부군이 처가의 제사에 참석한 것을 알 수 있으며, 혼인하고 처가살이를 한다거나 아이를 처가에서 낳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차별은 인류문화사에서 자연발생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반대로 고대 모계사회에서는 여성이 주도권을 잡았는데 무슨 법률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9. 포은 정몽주와 우리 민족의 자주성에 대해서 원천석이 야사를 지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철저하게 조선에 의해서 고려말의 상황이 조작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라는 생각은 질문자님의 추측이 아닌지요? 후손들이 없애버렸다는데 어떻게 마치 내용을 본 듯이 말씀하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려왕조실록은 언제 없어졌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고려사를 편찬할 때만 하더라도 있었던 것은 분명하므로 아마 임진왜란 때 불행히도 없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에서 고의로 폐기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것입니다. 다른 문헌이 있다면야 좋겠지만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은 거의 유일한 당대 기록이므로 참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충분히 사대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정신나간 짓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력의 차이와 시대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많았고 실리를 얻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자면, 명나라가 한족이 주도하는 나라였던 것은 맞지만 명 태조 주원장은 거지로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출신이 분명하지 않아서 한족인지 의문의 여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조가 고조선비사, 조대기, 삼성기, 삼성밀기를 수거한 것은 사실이지만 없애버렸다는 것과 이 책들이 우리의 자주적인 역사책이라는 것은 질문자님의 추측일 뿐입니다. 내용을 보지도 않았는데 제목만 보고 자주적인 역사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요? 분명한 것은 이 중에서 삼성기는 질문자님께서 생각하는 자주적인 역사책이 아닙니다. 삼성기三聖紀의 삼성三聖은 안함安含, 노원老元, 동중董仲이라는 민간에서 유명했던 불교 고승을 뜻하기 때문에 어떤 도참설의 성격을 지닌 책이 아닐까 생각하는 게 더 온당하지요. 한편 이성계가 문치주의를 택했다고 하는데 이성계 본인도 무인 출신이고 이성계와 절친했던 정몽주가 쓴 책문을 보면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발굴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문치주의를 택했다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코끼리 이야기라든가 곡식 보유량에 대한 것은 정몽주와 직접 관련이 없으므로 딱히 의견이 없습니다. 정몽주가 억상중농을 펼쳤다는 증거도 없고요. 게다가 저는 정몽주가 [단순히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조선건국을 거부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0. 정몽주와 군사전략 정몽주가 쓴 병법서라든가 군사전략에 관한 전해지는 자료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나마 제일 유사한 성격의 자료는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대책문(과거시험 답안지)이 아닐까 합니다. 관심 있으면 내용이 공개되어 있으니 한번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탁해서 조작하는 행태는 질문자님께서 두보의 예를 말씀하신 것처럼 옛부터 있었는데, 정몽주의 저술에도 그런 가짜가 끼어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포은집은 맨 처음에 포은시고라는 제목의 시집을 편찬한 것이 최초인데 나중에 중간하면서 계속 분량이 늘었기 때문에 원래 포은시고에 있지 않다가 나중에 늘어난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해볼 여지도 있는 것이지요. 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어떤 사람은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를 누군가가 이방원과 정몽주의 이름에 가탁해서 임의로 지어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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