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게시판

게시판

Re..글이 좀 기네요
작성자玄逸()작성일2013-08-03조회수1406
파일첨부

우리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분이 계셔서 앞으로 다행이고 참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생각을 달아보았으니, 참고해주세요.


================================



답변을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죄송하지만 님께서는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이성계의

조상때부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직전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부분.)등의 관찬사서를

너무 신뢰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습니까?

솔직히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사회에서도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실정을 감추거나

또 자신들의 공적을 과대포장하기 위해서 근거되는 자료들을 조작하거나 은폐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봉건 왕조사회야 오죽하겠습니까?


---> 이들 사서를 참조하지 않으면 역사 논의가 불가능해집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이미 관찬사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자기가 찬동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찬사서를 인용하고, 부정하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면서 부정한다면
결국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일관성이 결여된 태도가 되고 맙니다.


1번을 답변을 하셨는데요.

그런 식으로 치면 공양왕도 어리석고 한심한 왕이라서 결국 폐위하고 이성계가 천명과

민심의 지지를 얻어서 왕이 되었다라는 말도 무조건 믿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의 관찬사서들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죠.

공민왕이나 우왕이나 창왕이나 공양왕이나 고려말의 이 4명의 왕은 전부 다 어리석고

포악했다라고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물론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고 나서 포악해졌다고 기록을 하긴 했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포은 선생이 공양왕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 필요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논리적으로 말이죠.

아니, 우왕과 창왕이 포악하고 어리석어서 백성을 위한 대의로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면 공양왕도 결국 어리석고 한심하게

정치를 했다고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에 나오니, 그렇다면 포은 선생이

공양왕을 목숨걸고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차라리 조선건국에

협조를 하는 것이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님의 말씀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도대체 포은 선생이 목숨걸고 공양왕과 고려왕조를 지킬

필요가 무엇이 있다는 말씀인지요?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이 고려말의 4명의 왕이

전부 다 포악하고 어리석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죠.

--->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정몽주가 적극적으로 이성계를 탄핵한다든가 반동하지 않았고
선죽교에서 최후의 죽음에 있어서는 이미 각오를 한 듯한 모습이 성현의 용재총화 등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마지막에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음을 알고 순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려왕조를 배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미 운세가 기운 것을 바꾸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고뇌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정몽주의 뜻이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어서, 성리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정몽주의 학문은 조선왕조 수백 년 동안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성계 측의 주장은 조선시대의 신료들이나

선비들조차도 조금이라도 양심이나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안 믿었습니다.

도대체 이걸 누가 믿었다는 말인지요?

자신이 조선의 관료로서 활동을 하고 있고 또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천석의 주장이(원천석은 이성계 측이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고 날조를 한 것에

분개해서 자신이 시와 고려말의 역사를 사실대로 서술한 '야사.' 6권을 통해서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정론으로 채택이 되어서 조선시대의 관료들이나

선비들이나 조금이라도 양심이나 상식이 있는 사람쳐놓고 이성계 측의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에 가깝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성계측이 조작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 아닙니까?

만약에 우왕이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기록대로 포악하고 어리석었다면

왜 이성계측이 우왕 폐위의 주된 명분으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이유를

대었겠습니까?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때 처럼 그냥 우왕이 포악하고 어리석게

정치를 해서 폐위를 하고 어질고 현명한 공양왕을 추대했다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말이죠.

우왕이 조선의 관찬사서들의 내용과는 다르게 포악하고 어리석게 정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한 폐위구실이 없으니까 이런 식의 이상한 날조를 해서 우왕을 폐위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려말과 조선시대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모르겠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죠.

제가 너무 잘난 체를 한다고 오해를 하실 수 있겠지만, 이거 생각하는 것.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 이 부분은 이미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원천석이 야사 6권을 통해서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야사 6권을 보셨다면 혼자만 알지 말고 모두에게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심지어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의 이야기들을 액면그대로

믿고 고려 우왕말의 상황을 보아도 절대 고려말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 일보직전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선, 외적인 문제인 원나라,홍건적,여진족,왜구의 공격은 최영,이성계,최무선,변안열,

정지등의 활약으로 거의 모두 다 정리가 되었고 내적인 주 문제인 고려말의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경우도 공민왕때의 친원파 대량 숙청에, 또 신돈에 의해서 2차로 대량숙청이 되었고,

또 우왕때도 최영에 의해서 부패한 무장들과 권문세족에 대한 숙청작업이 있었고

심지어 우왕말년에는 우왕과 최영,이성계의 연합공격으로 이인임 일당으로 대표되는

고려말의 부패한 권문세족 숙청의 최절정을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연려실기술에서 읽은 것으로는 최영은 이때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철저하게 숙청하기

위해서 혁폐도감이라는 관청까지 만들어서 이인임,임견미,염흥방,도길부 등의 핵심인사들과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각각 1천명씩, 도합 수 천명을 죽였다고 나옵니다.

---> 제가 원문을 확인해보니 연려실기술의 그 내용은 박동량의 기재잡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기재잡기 원문에는 한 집에서 십여 명씩이라고 한 것을 연려실기술에 이르러서는 각 천여 명이라고 과장되었습니다.



최영의 이 숙청작업은 너무나 지나친 면이 있어서 오죽하면 이성계조차도 너무 지나치게

사람을 많이 죽인다고 최영에게 건의를 하고 더 이상의 숙청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지만

최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에 나옵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때 최영이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대량으로

숙청했고 당시에 조정의 신료들이나 백성들도 모두 좋아했지만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것이 고려왕조 멸망의 중요한 한 요인이 되었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고려왕조를 위해서 일할 사람이 매우 적어졌다는 이유로 말이죠.

---> 이것은 맞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대량 숙청한 최영 장군을 어떻게 보수파나 수구파로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지요?

오히려 고려말의 급진개혁 세력으로 불리는 이성계보다도 더 철저하게 고려말의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숙청한 최영 장군을 말이죠.

---> 일리는 있습니다만 인물의 어떤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여러 난을 진압하는 충직한 무신일 때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말씀하신 대로 자신도 권문세족 출신인데 권문세족을 숙청할 정도로 위엄 있는 개혁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그런데 질문자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셨던 것은 정몽주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는 이성계보다 보수파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최영이 살아있었다면 과연 우왕, 창왕 폐위에 찬성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최영 장군이 원나라측과 싸운 것이 어디 하나,둘입니까?

대표적인 경우를 몇 개 들자면,

공민왕의 친원파 숙청의 주된 피해자는 원나라 기황후의 일족인 기씨일족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친정이 모조리 도륙되자 이에 분노한 기황후가 복수를 위해서 보낸 원나라 군대를

제일 먼저 싸워서 이긴 사람이 최영장군이 아닙니까? 달천 전투에서 말이죠.

그리고 원나라 잔당들이 점령하고 있던 제주도를 탈환했고 또 고려말에 최초로 인당 장군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서 원나라 군사기지들을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최영 장군이 친원파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말이죠.

---> 말씀하신 내용은 맞습니다. 최영은 무조건적인 친원파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친명파는 더더욱 아니지 않습니까?
우직한 무인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친원파나 친명파를 자처하면서 권세에 붙을 성격은 아닙니다만
역사적 틀에서 볼 때 요동정벌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고 상대적인 친원파로 분류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정말로 죄송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고려말의 인물들중에서 민간에서 제일 신으로

떠받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최영 장군이 아닙니까?

아니, 최영 장군은 우리나라 5000년 역사상, 여러 많은 위인들이나 영웅들중에서 민간에서

가장 많이 신으로 모셔지는 인물입니다.

최영 장군이 인격적으로나 능력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으면 어떻게 백성들이

우리나라 5000년 역사상의 여러 많은 위인들이나 영웅들중에서 민간에서 가장 신으로

모시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이건 정말로 아니다 싶네요.

고려사의 기록을 보아도 최영 장군이 죽었을 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상가는 철시를 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가 아닙니까?

---> 맞습니다. 강직한 성격을 가진 충직한 무인으로, 최영은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죄송하지만 포은 선생의 경우는 고려사 정몽주전에서 포은 선생이 죽었을 때

나라 안의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고려사 정몽주전과 고려사절요를 보아도 말이죠.

---> 맞습니다. 그러나 나라 안의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라는 기록이 있어야만 꼭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에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를 받은 것이 정말이라면 왜 목은 이색이나 도은 이숭인이나 야은 길재나

원천석 같은 고려의 충신들의 문집이나 기록에도 왜 이런 사실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까?

그게 정말이면 이색이나 이숭인이나 길재나 원천석 같은 사람들의 문집이나 저서에도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 제가 문집을 다 확인해본 것은 아닙니다만 질문자님의 주장대로 문집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고려사가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왕, 창왕을 폐위하는 데 가담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어야 질문자님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고,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면 가담했을 가능성과 가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모두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입증하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지, [귀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없다]라는 말은 심증일 뿐 확실한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게 정말이면 포은 선생의 스승인 이색이나 동료인 이숭인이나 길재나 원천석이나

기타 다른 고려에 충성을 했던 충신들이 과연 포은 선생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배신자,역적이라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을 폐위시키고 죽이는 문제가 어디 보통 문제입니까?

만약에 포은 선생이 정말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고 목은 이색이나 이숭인,길재,원천석 이나 기타 다른 고려측의

인물들의 문집이나 저서에 나온다면 아무래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렇지 않고 오로지 철저하게 조선의 입장에서만

쓰여진 고려사,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관찬사서에만 나온다면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근본적으로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 앞서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기록이 누락된 것일 수도 있고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추측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입증할 증거가 없습니다.





지금 답변하신 님께서도 포은 선생이 정말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대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고려사 > 卷四十五 世家 卷第四十五 > 恭讓王 元年 > 12월

○ 壬子 敎曰, “恭惟, 我太祖開國以來, 子孫相承, 克奉宗祀. 至恭愍王, 不幸無子薨逝, 賊臣李仁任欲專政權, 貪立幼孽, 詐以辛禑稱王氏, 立以爲主. 禑乃頑凶狂悖, 將欲陵犯遼陽, 侍中 李太祖舊諱等, 以社稷大計, 諭衆回軍, 議立王氏. 主將曹敏修, 以仁任之黨, 復擅權柄, 繼其奸謀, 乃沮衆議, 立禑子昌, 王氏絶祀, 神人共憤者, 十有六年. 於洪武二十二年十一月十五日, 侍中 李太祖舊諱奮忠倡義, 乃與沈德符·鄭夢周·池湧奇·偰長壽·成石璘·朴葳·趙浚·鄭道傳等, 上奉天子明命, 謀及宗親·耆老·文武臣僚, 啓奉恭愍王定妃之命, 廢禑·昌父子. 以予於王氏最親, 俾承祖宗之統. 雖予寡德, 未堪負荷, 李【太祖舊諱】等, 正名興復, 再造王室, 其功實不在太祖開國功臣之下, 帶礪難忘. 壁上圖形, 父母妻封爵, 子孫蔭職, 宥及永世, 主者施行.”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하신 이래 자손들이 그 뒤를 이어 능히 종묘의 제사를 받들어 왔다. 그러나 공민왕(恭愍王)대에 와서 불행히 아들을 두지 못하고 별세하게 되자 역적 이인임(李仁任)이 굳이 어린 서자를 내세워 정권을 독점하려는 욕심으로 신우를 왕씨라 사칭하고 그를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어리석고 광패한 신우는 명나라 요양(遼陽)을 침범하려고 했으나, 시중(侍中) 이성계 등이 국가를 위한 큰 계책을 세워 군사들을 설득해 회군한 다음 왕씨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이인임의 일당인 주장(主將) 조민수(曹敏修)가 다시 권력을 농단하면서 간특한 음모로 여론을 저지시킨 다음 우의 아들인 창(昌)을 세우니, 왕씨의 제사가 끊어져 신(神)과 사람이 함께 분노한 것이 열여섯 해나 되었다.
홍무(洪武) 22년(공양왕 원년 ; 1389) 11월 15일, 시중(侍中) 이성계가 분연히 충의를 떨쳐 일어나 심덕부(沈德符)·정몽주(鄭夢周)·지용기(池湧奇)·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박위(朴葳)·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천자의 명령대로 종친(宗親)·기로(耆老)·문무신료와 함께 계책을 정한 후 공민왕(恭愍王) 정비(定妃)께 아뢰고 그 분부를 받들어 우·창 부자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왕씨 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나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했던 것이다.
비록 나는 덕이 적어서 이 무거운 책무를 감당할 수 없으나 이성계 등이 명분을 바로 잡고 왕실을 부흥시켜 왕업을 잇게 했으니 그 공은 실로 태조 당시 개국공신(開國功臣)보다 낮지 않으며 산하가 마르고 닳도록[帶礪]19) 잊기 어렵도다. 공신각에 초상을 걸고 부모와 처에게는 작위를 내릴 것이며 자손에게 음직(蔭職)을 주고 만약 죄를 지어도 영원히 용서할 것이니 주무 관청에서는 분부대로 시행하라.”

[네이버 지식백과] 공양왕 원년(1389) 기사년 (국역 고려사, 2008.8.30, 경인문화사)

저는 방금 고려사의 기록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질문자님께서는 다른 고려인의 문집에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심증만 제시하고 있을 뿐 확실한 증거를 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럴거면 포은선생이 뭐하러 끝까지 고려왕조에 충성을 했다는 말입니까?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에서 말하는 고려말의 4명의 군주의 행적과

고려말의 상황이 100%에 가깝게 거의 다 사실이라면 말이죠.

그리고 지금은 원천석이 쓴 '야사.' 6권은 나중에 그의 증손자들이 읽어 보았는데

조선에서 선전하는 고려말의 역사와는 거의 대부분 맞지 않았고 그래서 혹시나 이 책에

대한 소문이 조선조정에 알려지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해서 죄다 없애버렸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리고 또 고려에 대해서 고려인의 입장에서

쓰여진 고려왕조실록은 지금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천석의 '야사.'나 고려왕조실록 같은 고려인이 고려의 입장에서 쓴 고려의 역사책과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처럼 조선인이 조선의 입장에서 쓴 고려의

역사책과 서로 내용을 비교,대조를 해봐서 논리적으로 냉정히 따져서 맞는 쪽의 이야기를

진실로 인정을 해야할텐데, 안타깝게도 고려인이 고려의 입장에서 쓴 고려말의 역사책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철저하게 조선의 입장에서 날조하고 조작해서 쓴 고려사,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같은 책만 보고 어떻게 고려말의 4명의 군주와 또 고려말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는 것인지요? 죄송하지만 말이죠.

--->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고,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이 철저하게 날조됐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조작의 가능성 때문에 순수하게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이들 사서가 없으면 역사 논의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아예 위조됐다고 단정한다면 모두 부정해야 할 것인데 그러면 대한민국 이전의 역사는 어디로 갑니까? 개인 문집의 단편적인 사실 기록이 역사가 되는 것인가요?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실정을 감추기 위해서,

또 자신들의 공적을 과대포장하기 위해서 관련자료들을 조작하고 폐기하는 일이 매우

많은데 말이죠.

아니, 그러면 현대 민주주의 시대의 정부기록보다 봉건왕조시대의 관찬사서들이 훨씬

더 정직하고 올바르게 기록이 되었다는 말인지요?

---> 정보통신 발달로 민간 신문기사나 전산화된 정보는 넘쳐나지만 정부 주도로 역사를 기록하는 면에 있어서는 실제로 조선시대 기록관리가 지금보다 나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 헌법 원본이 분실돼서 어디 있는지 모르고 대한민국 국새 주조에 관한 많은 기록도 사라져서 알 수 없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실록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기록 관리 수준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조금만 상식이 있어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죄다 사실대로 쓰면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들이 알면 그렇게 사실을 쓴 사관들을

가만 두겠습니까?

당연히 죽일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조선시대때 이런 문제로 죽은 사람이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의 손자인 원숙강과

성종때의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아닙니까?

---> 질문자님께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계신 것도 조선왕조실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허물을 기록함으로써 더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2번 문제인데요.

저는 조선왕조실록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가서 포은집으로 검색을 했는데 포은집에 대한

내용이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물은 것입니다.

--->

宣修 19卷, 18年(1585 乙酉 / 명 만력(萬曆) 13年) 7月 1日(庚午) 2번째기사
문천상 등의 문집 간행 및 반포를 명하다
○命刊布文天祥、方孝孺、鄭夢周文集。 上欲崇表節義, 以勵風俗, 故有是命, 命盧守愼作序文。 又刊行《岳王精忠錄》, 柳成龍作序文。



그리고 님의 말씀대로 포은집이 간행이 되면서 조선왕조의 도움을 받았다면, 당연히

조선왕조에 유리하게 내용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생각을 해 봐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조건 부인만 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 물론 가능성은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는 것이 신라말과 고려초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은 말년에

고려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할 것을 예견하고 왕건을 지지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봉건왕조시대의 학자들이나

현대의 학자들도 말이죠.

봉건왕조시대의 어느 학자는 최치원은 신라의 관리로 살았고 또 신라가 날이 갈수록

엉망이 되는 것을 보고 이를 개탄해서 초야에 숨어서 자신의 몸을 깨끗히 한 선비인데

이런 모순적인 행동을 할리가 있었겠냐고 하면서,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치원의

문인들이 대거 고려왕조에 출사해서 벼슬을 했으니 아마도 최치원의 문인들이 자신들의

스승을 위해서 과대포장해서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그런데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자면, 왜 확실히 조작하지 않고 조작으로 의심받을 만한 내용을 기록했을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의심은 할 수 있습니다만 확증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경우 태종 이방원이 집권 말년에 조선왕조에 불리한 사실들이 기록이 된

민간의 예언서적들을 모두 수거해서 없앴고 이중에는 목은 이색의 목은집 15째권도

있다라고 국조보감과 연려실기술에 나오는데, 어떻게 무조건 포은집은 절대 조선왕조에

유리하게 조작될 리가 없다라고 100% 단정을 하실 수 있는지요?

---> 세조 시대의 책 수거에 대해서는 9번 답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태종의 책 수거 기록을 확인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太宗 24卷, 12年(1412 壬辰 / 명 영락(永樂) 10年) 8月 7日(己未) 2번째기사
사관 김상직에게 충주 사고의 책을 바치도록 명하다
○命史官金尙直, 取忠州史庫書冊以進。 《小兒巢氏病源候論》、《大廣益會玉篇》、《鬼谷子》、《五臟六腑圖》、《新彫保童秘要》、《廣濟方》、陳郞中《藥名詩》、《神農本草圖》、《本草要括》、《五音指掌圖》、《廣韻》、《經典釋文》、《國語》、《爾雅》、《白虎通》、劉向《說苑》、《山海經》、王叔和《脈訣口義辨誤》、《前定錄》、《黃帝素問》、《武成王廟讃》、《兵要》、《前後漢著明論》、《桂苑筆耕》、《前漢書》、《後漢書》、《文粹》、《文選》、《高麗歷代事迹》、《新唐書》、《神秘集》、《冊府元龜》等書冊也。 且命曰: “《神秘集》, 毋得披閱, 而別封以進。” 上覽其集曰: “此書所載, 皆怪誕不經之說。” 命代言柳思訥焚之, 其餘下春秋館藏之。

여기서 불태운 것은 《神秘集》하나 뿐이고 나머지는 춘추관에 보관하라 했지 없애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조선왕조에 불리한 사실들이 기록된 민간의 예언서적이 아니라, 각종 한의학 서적을 비롯해 이아와 같은 유교 경전, 최치원의 계원필경 등을 임금에 진상한 것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중중 때까지 잘 보관하고 있었음을 아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中宗 16卷, 7年(1512 壬申 / 명 정덕(正德) 7年) 9月 6日(丁丑) 3번째기사
홍문관에서 본관이 간직하고 있는 《동인시집》·《보한집》 등을 바치다
○弘文館將本館所藏《東人詩集》、《四佳集》、《保閑集》、《應製詩》、《樗軒集》、《大虛亭集〔太虛亭集〕》、《楊村集》、《稼亭集》、《及菴集》、《雪谷集》、《霽亭集》、《惕若齋集》、《關東瓦注》、《柳巷義谷集》、《復齋集》、《益齋亂藁》、《圓齋集》、《栗亭集》、《李相國集》、《獨谷集》、《春亭集》、《雙梅堂集》、《桂苑筆耕》、《牧隱集》、《拭疣集》、《陶隱集》、《晉山世藁》等集以進。

한편 국조보감과 연려실기술에 나온다는 목은집 수거 기록을 못 찾았습니다. 목은집, 이색으로 검색해봤으나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군요. 원문을 제시해주세요.




포은 선생의 문인들이 최치원의 문인들처럼 조선왕조에 출사를 했었고 그리고 심지어

포은선생의 아들까지 태종때 이미 출사를 한 상황에서 세종때 포은집을 발간을 했는데

과연 이때 포은집이 조선왕조에 유리하게 조작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라고 어떻게

100% 단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라는 말이 정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 맞습니다. 증거는 없으나 가능성은 있습니다. 귀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요.



그중에 하나가 이것이 아닙니까? 포은 선생이 이성계에 대한 시를 쓴 것이 있는데

거기서 포은선생이 이성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은 세종대왕이 자신들의 조상을

꾸민 것보다 정도가 더 심했습니다.

무슨 이성계를 제갈양에 비유를 하질 않나요, 또 고금을 통틀어서도 이성계 같은 사람은

없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질 않나요,

세종대왕도 용비어천가에서 이 정도로 태조 이성계를 찬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성계의 용모가 고금에 없는 뛰어난 관상이라는 이야기는 있었어도, 이성계의 능력이

고금에 없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진 않았습니다.

---> 제가 무식해서 어떤 시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제시해주세요.






이성계가 그렇게 뛰어난데 왜 위화도 회군 전까지 늘 최영 장군의 아래였단 말입니까?

단지 최영 장군이 이성계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선배라서 그런 것일까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또 앞으로나 정말로 능력이 제일 뛰어난 사람은 나이나 선배나

지위를 초월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상식이 아닙니까?

삼국지에서(소설 말고 정사 삼국지.)제갈양은 관우,장비,조자룡,손건,미축,간옹등보다

나이가 훨씬 적었고 유비밑에서 벼슬을 한 년도도 훨씬 적었지만 탁월한 능력으로

일찌감치 관우,장비,조자룡,손건,미축,간옹등을 뛰어넘고 유비측의 2인자로서 입지를

굳히지 않았습니까?

또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재상인 인상여의 경우 조나라의 명장인 염파의 거의

아들벌의 나이였지만 일찌감치 염파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이거 외에도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기록들을 보면 정말로 인격이나 능력이 걸출한

사람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관직에서 선배라고 해도 이를 극복하고 제일 높은

자리에 오른 경우는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을 보면 최영은 인격적으로나 능력적으로

매우 뛰어난 사람이지만 이성계에 비교를 하자면 아무래도 밀리는 인물쯤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또 최영은 위화도 회군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이성계를 견제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고 매우 사이좋게 지내지 않았습니까?

남이 이성계를 모함하면 화를 내면서 이성계를 극력변호를 해 주고 둘이 같이 식사를

할 때는 자신보다 이성계에게 음식을 더 좋게 제공할 정도로 이성계를 매우 아꼈는데

이런 것들을 보면 당연히 이성계가 최영보다 위에 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포은 선생의 시대로 이성계가 제갈양급이고 고금에 없는 뛰어난 영웅이라면 말이죠.

최영이 자신을 시기하거나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각별히 아꼈는데 그렇다면 이성계가

왜 위화도 회군이전까지 늘 최영보다 아래에 있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

않습니까?

---> 제 마음대로 추측하자면 최영은 권문세족 출신이고 병권을 장악한 데다가 나이도 많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저는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는 아니고 일반 보통 사람이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말이죠.

또 위에서 말씀 드렸지만 이미 태종은 재위 말년에 조선왕조에 불리한 사실을 적은

예언서들을 모두 수거해서 없앴고 그중에는 목은 이색의 목은집 15째권도 있다라는 것을

감안을 하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아닙니까?

--->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물증이 있어야 되니까 확실하게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말이죠.

실제로 포은집이 원래의 포은집의 100분의 1밖에 안 남은 것도 포은 선생이 간신으로

몰려서 죽었을 때 거의 대부분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까?

---> 원래의 포은집이라 함은 무엇을 말씀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포은 선생은 우리나라 성리학을 탄생시킨 한국 성리학의 시조로 칭송을 받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포은집으로는 도저히 포은선생의 성리학의 수준을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성리학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에 가깝게 안 나오고 거의 죄다 수필이나, 시밖에 안 남아서

말이죠. 그나마 그 수필이나 시도 얼마 안 되고 말이죠.

그리고 유학자들은 무조건 다 정직하다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 맞습니다만 무조건 거짓말쟁이라는 보장도 없지요.



조선에서 고려사를 최초로 쓴 삼봉 정도전만 해도 고려사에서 자신의 조상에 관한 부분을

사실과 다르게 조작을 했다라는 이야기가 있고 또 이후 고려사의 경우에도 고려사를 쓰는

사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조상을 사실과 다르게 좋게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그 사람들의 조상을 사실과 다르게 좋은 쪽으로 썼다가 이게 들통이 나서 고려사를 다시

쓰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적도 있지 않습니까?

---> 맞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지금 알 수 있는 것도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포은선생의 행적만 해도 그렇습니다. 조선중기에 사림파 선비들중. 강직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포은 선생의 행적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지 않았습니까?

---> 글쎄요. 질문자님께서 아래에서 말씀하셨듯이 조광조 같은 사람은 문묘배향 논쟁 때 정몽주를 옹호했습니다.



즉, 우왕과 창왕이 진짜 공민왕의 아들이었다면 왜 10년 넘게 우왕을 섬기면서 우왕의 녹을

먹은 포은이 자신이 섬긴 우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냐고 비판을 한 것이고, 또 만약에 우왕과 창왕이 진짜 신돈의 아들이라면, 왜 우왕밑에서

우왕의 녹을 먹었냐는 비판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조선중기의 대유학자인 이황과 조선후기의 대유학자인 송시열은 정당한

논리도 대지 못하고 무조건 포은선생은 위대하시니 그런 이야기는 언급을 하지 말라라는

식의 억지스러운 옹호를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남을 정말로 제대로 옹호를 할려면 확실한 물증이나 아니면 확실한 논리적 증거를

대어서 남을 옹호를 해야 하는데 포은 선생은 무조건 위대하신 분이니 그런 이야기는

언급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옹호를 하는 태도가 제대로 된 유학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도 조광조는 그 당시에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인지, 아니면 공민왕의 아들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포은 선생이 일단 우왕 밑에서 벼슬을 했고 나중에 이성계와 뜻을 맞추어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을 섰다라고 부실한 논리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로

논리를 갖추어서 옹호라도 했지요.

이렇게 제대로 된 물증도 대지 못하고 또 제대로 된 논리도 대지 못하고 무조건 포은선생은

위대하시니 그런 말은 꺼내지 말라라는 이황과 송시열의 태도가 제대로 된 사람들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학자를 어떻게 그렇게 무조건 100% 신뢰를 하시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갑니다.

물론 확실한 물증은 없으니 저도 제 이야기가 100% 사실일 것이라고 주장은 못하지만

포은집이 간행이 될 때 조선왕조가 편찬에 관여를 했다면 조선왕조의 입김이 전혀

안 들어갔다고 어떻게 100% 장담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 수차례 말씀드린 바와 같이 100% 장담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근거가 없기 때문에 채택하지 않을 뿐입니다.





다음으로 포은 선생이 외교활동에 나서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님께서는 포은 선생의 그 시가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을 하신 것이군요.

그렇다면 그 논문을 쓴 학자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닙니까?

고려사의 기록대로 백성과 나라와 왕을 위해서 외교활동을 하는 것에 매우 사명감이

있었다면 어떻게 그런 시를 포은 선생이 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저는 [백성과 나라와 왕을 위해서 외교활동을 하는 것에 매우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 그 정도 시를 허심탄회하게 읊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른 것이지요.

논문 저자의 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100% 완벽하다면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아닌가요.




그리고 다음으로 포은 선생이 최영,이색,경복흥,이인임등의 당시 원로 재상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연 것 말인데요.

최영장군이나 이색,경복흥등은 인격적으로나 훌륭한 분들이니 그렇다고 치고

이인임은 정말로 문제가 아닙니까?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이라는 논문을 쓴 고혜령씨는 이인임은 우왕을 즉위시킨

일등공신이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고 조작을 한 이상 우왕을

즉위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인임을 철저하게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식으로

조선왕조에서 이인임을 사실과 다르게 철저하게 나쁜 쪽으로 조작,왜곡을 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만약에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이야기대로

이인임이 정말로 썩어빠진 간신배라면, 이인임을 초청하는 포은 선생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 이전 답변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인임을 초청한 것이 아니라 기로를 초청한 것이고,
저는 개인적으로 선악을 어떤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이인임이 나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초청 명단 중에 이인임이 섞여 있다고 해서 그게 무슨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죽하면 이런 시도 있지 않습니까?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라는 속담 말입니다.

아니 명색이 한국 성리학의 시조이고 고려말의 대표적인 충신이고, 또 왕좌지재라는 별명까지

가진 포은선생이 아무리 재상들을 위로하기 위한 잔치라지만, 어떻게 백성과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간신까지 초청해서 연회를 열 수 있다는 것인지요?

이거 비유로 치면, 성삼문이 세조 당시 재상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열었다고 가정을

하면 그 잔치에 성삼문이 한명회나 홍윤성,신숙지,정인지까지 초청해서 잔치를 연 격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성삼문이 이랬다면, 성삼문이 비판을 안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시에 말입니다.

---> 비유가 이상합니다. 사육신과 생육신의 관계를 정몽주와 이인임의 관계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말이라면 진짜로 거센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정말로 충신이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간신과는 한 자리에 안 서는 것이

올바른 것인데 왜 일부러 간신을 자신의 집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이인임에 대해서는 제가 이인임의 본관인 성주 이씨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아가서 보니 충신이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간신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 이거야 자기네 조상을 억지로 옹호할려고 그랬다고 하면 할 말은 없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서도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후손은 무조건에 가깝게 자기

조상들을 사실과 다르게 좋은 쪽으로 조작,미화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왜 포은 선생의

문인들은 왜 자신들의 선배,스승을 사실과 다르게 좋은 쪽으로 조작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라는 논리가 나오는 것인지요?

그 사람들이 유학자라서 그런 것입니까?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위의 제 글에서 반론을 달았습니다.

부족한 면이 있어도 말이죠.

---> 전혀 조작 가능성이 없다고는 안 했습니다. 저는 질문자님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최영 장군과 포은 선생의 관계 말인데요.

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포은 선생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까?

아니, 길재나 원천석 같은 사람들은 이미 우왕과 창왕이 폐위되고 죽는 것을 보고,

이미 고려는 망했다고 판단하고 초야에 몸을 숨기고 나오지 않았고 조선왕조에

출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색과 원천석의 경우는 이미 위화도 회군때부터 고려왕조에 위기가 닥쳤다고

자각을 했습니다. 이색의 경우는 창왕때 그래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일부러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을 같이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까? 이성계가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할려고 말이죠.

이거 고려사 이색전과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도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당대 최고의 대유학자이고 대정치인인 포은 선생이 이런 것도 진작에 눈치를

못 채고 이성계측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놀아났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지 않습니까?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 분명히 나옵니다. 이미 위화도 회군때부터 이성계의 측근들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말이죠.

님께서는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같은 관찬사서를 철저하게 신뢰를

하시면서 왜 이 부분은 안 믿으시는 것입니까? 또 논리적으로 따져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 저는 관찬사서를 신뢰하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신뢰하지는 않고요,
이성계의 뜻을 눈치채지 못 했다고 해서 정몽주가 너무나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이해는 갑니다만,
이것은 생각의 자유 문제가 아닐까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이고 왕좌지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또 이성계와 평소에 매우

절친한 포은 선생이 이성계측의 이런 음모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공양왕 후반기에 가서야

비로소 이성계측의 음모를 알고 이성계측과 대립을 했다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솔직히 말이죠. 그리고 만약에 그게 정말로 사실이라면 포은 선생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고 말이죠. 정말로 죄송하지만 말이죠.

그리고 고려왕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이성계측을 견제를 해야하고 그래서

이성계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무장인 최영은 어떻게 해서든 살렸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고려말에 이성계를 견제할 수 있는 장군이 최영 말고 도대체 누가 있다는 것입니까?

이거 그 당시 사람이라면 어린아이도 다 알만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평소 포은선생은 최영장군과 정책적인 견해때문에 매우 반목을 했다면 이것 역시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중국 전국시대 말의 조나라가 진나라보다 국력이 훨씬 모자랐지만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우습게 보지 못한 것이 조나라를 이끄는 두 기둥인 인상여와 염파가 서로 화합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물론 처음에는 염파가 인상여를 매우 미워했지만, 인상여는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서

염파에게 시종일관 굽혔고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된 염파는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인상여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면서 사죄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고려는 고려를 지키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이색까지 치면 3명이겠죠.)

최영장군과 포은선생이 정말로 이렇게 심하게 반목을 한다면 도대체 고려왕조를 어떻게

지킬 수 있다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제가 어렸을 때 읽은 이성계의 전기에 나오는 내용이 거짓이고, 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포은 선생은 여기서 또 한 번 어리석은 악수를 두어서 결국 고려왕조의 멸망을

재촉한 것 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포은선생의 후손이신 님에게는 정말로 죄송하지만 말이죠.

솔직히 좀 어이가 없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님이 말씀하신 최영장군과 포은 선생의

사이가 정말이라면 말이죠. 물론 이 점은 최영 장군도 크게 잘못한 것이 맞겠지요.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최영 장군은 부패한 기득권자가 아닙니다.

--->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네요. 개인 생각의 문제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최영이 부패한 기득권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왜 최영 장군이 죽었을 때 온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슬퍼했겠으며,

또 최영 장군이 죽은 이후 최영 장군을 신으로 받들어 모셨겠습니까?

그리고 고려 우왕말의 이인임 일당으로 대표되는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숙청할 때,

흔히 급진개혁파로 불리는 이성계보다 최영 장군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숙청했다라는 것을 간과를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오죽하면 급진개혁파인 이성계가 최영 장군의 부패한 권문세족 숙청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렸겠습니까? 이거 고려사 최영전이나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에도 엄연히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님께서는 다른 것은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같은 관찬사서를 매우

신뢰를 하시면서 왜 이런 부분들은 신뢰를 안 하신다는 말입니까?

---> 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최영의 개혁적인 모습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민간의 백성들에게 이성계의 별명이 뭡니까?

바로 성계육,성계탕이 아닙니까? 이성계가 정말로 인격적으로나 능럭젹으로 매우

훌륭한 인물이고 포은 선생이 시에서 제갈양과 동급으로 비교를 하고, 고금에 이성계만한

인물이 없다라고 극찬할 정도로 좋은 인물이면, 왜 이성계가 성계육,성계탕 소리를 들으면서

백성들의 저주를 받았는지, 또 이성계에 의해서 날조된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최영 장군은

왜 우리나라 5000년 역사상 여러 위인,영웅들중에서 민간에서 가장 많이 신으로 모시는

인물인지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까?

당시나 후대의 백성들이 무조건 바보,멍청이라서 최영장군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최영장군의 죽음 이후 최영 장군을 신으로 모셨겠습니까?

사실, 최영 장군은 한국판 관우라고 할 수 있지요. 백성들에 의해서 신으로 모셔진

대표적인 인물이니 말이죠. 그런데 관우보다도 최영 장군이 더 낫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관우의 경우는 역대 중국의 황제들이 자신과 자신의 왕조에 대한 충성심 고취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관우를 신격화를 해서 중국의 민중들이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지만(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국 민중들이 관우를 신으로 모신 것은

단지 역대 중국 황제들의 관우 신격화 정책때문만은 아니지요. 중국 민중들이 진심으로

관우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요인도 있지요.)여기에 비해서 최영 장군은 조선왕조의

최영 장군 신격화 작업이 전혀 없이 100% 순수하게 민중들의 존경만으로 신으로 추앙된

인물이니 관우보다도 더 위대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 네 최영은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기록상의 인격이나 능력을 보아도 관우보다 월등하고 말이죠.

최영 장군이 단지 포은 선생과 고려를 이끄는 견해차로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해도

최영 장군을 친원파,수구파로 모시는 님의 말씀은 정말로 아니다 싶네요.

---> 최영이 맹목적인 친원파는 아니지만 정치적인 잣대에서는 친원에 가깝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구가 꼭 나쁜 개념은 아니에요.




그리고 포은 선생조차도 최영 장군의 인격적인 면이나 능력적인 면은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시로서 최영장군을 칭송한 적도 있는데 어떻게 최영 장군을 무조건

친원파네,수구파네 라는 식으로 최영장군을 매도를 하실 수 있습니까?

이 점은 정말로 죄송하지만 아니다 싶네요.

어쨌든간에 최영 장군과 포은 선생이 정책적인 견해차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 님의 의견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님께서 말씀하신 최영 장군과 포은선생이 정책적인 견해차로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라는 이야기의 근거는 당연히 또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같은

조선의 관찬사서들입니까?

제 입장에서는 무조건 배척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믿을 수만도 없으니

만약에 목은 이색이나 이숭인이나 길재나 원천석이나 기타 다른 고려측 인물들의 문집이나

저서에도 있다면 아무래도 님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 입장에서는 무조건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힘들 것 같네요.


---> 죄송하지만 제 학식이 짧아서 고려인의 문집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고려사에 대해서는 태조 왕건때부터 마지막 공양왕때까지 전체적으로 조작되고

왜곡된 부분들이 많다고 조선의 양심적인 관료들이나 선비들조차도 솔직하게 인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나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과 송도기이를 쓴 이덕형 등이 말이죠.

특히 이덕형은 송도기이에서 고려사는 전체적으로 패국(敗國)인 고려를 깎아내리는데

급급했다고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신흠의 경우는 고려사는 전체적으로 조작과 왜곡이 있어서 다 믿을 것은 못 된다고

하였고 특히 고려말의 경우는 더욱 어긋나고 틀렸다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조선의 양심있는 관료들과 선비들까지 곧이곧대로 다 안 믿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같은 철저하게 조선의 입장에서 쓴 고려시대의 역사서를 왜 포은 선생의

후손인 님께서는 비교적 철저하게 믿으시는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당연히 의심하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까?

---> 네, 이해합니다.



조선에서 포은 선생을 진정으로 생각을 했다면 고려사 정몽주전에서 태종 이방원과

포은 선생의 '하여가.','단심가.' 일화를 왜 삭제를 했겠습니까?

---> 저는 하여가, 단심가 일화 자체가 조작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17세기 이전 기록이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요.



또 포은 선생이 죽을 때 이미 살 수 없는 상황인데도 왜 2번이나 구차하게 도망가다가 죽었다고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에서 말을 했겠습니까?

---> 기록이 조작인지 과연 실제로 사실이 어떠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포은 선생이 죽은 선죽교는 원래의 명칭이 선지교인데 그것이 왜 나중에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었는지, 또 포은 선생이 선죽교에서 죽었을 때 흘린 피가 고려사의 최종 수정을

지시했던 세종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세종이 모를 리가 없을텐데 왜 이 이야기도

안 했을까요? 포은 선생을 진정으로 생각을 했다면 말이죠.

그 피가 계속 남아있었고 그래서 그 피를 보존하기 위해서 지금의 선죽교는 돌난간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통행하는 것을 막은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실들을 세종이나 고려사를 편찬하는 사람들이 몰라서 안 썼겠습니까?

---> 질문자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님. 혹시 이것을 아십니까? 조선왕조가 얼마나 거짓말을 매우 잘하는 왕조라는 것을

말이죠.

그 대표적인 것이 먼저 세종때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포은선생편입니다.

태종 이방원이 포은 선생을 죽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세종은 이 책이 백성들에게

윤리교과서로 쓰여서 백성들이 널리 읽을 것을 알아서 포은 선생편에서 포은 선생을

죽인 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성계의 친척인 이제와 이화였다고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식의 추잡한 조작까지 했습니다. 이거 알고 계십니까?

또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에서 이순신 장군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순신 장군의 경우 선조편의 원판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재능은 있어도 겁이 많고

원균의 공을 가로채서 자기 공으로 삼는 썩어빠진 인물로 주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고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무능한 대처로 전멸을

하자 비로소 이순신 장군이 인격적으로나 능력적으로 위대한 명장이었다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선조와 조정 신료들의 정신나간 헛소리에 분개한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쓴 사관은

이렇게 평을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고금의 어진 명장들도 따라가지 못한 위대한

사람이었고 원균은 썩어빠진 소인배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하면서, 조정에서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서 이순신 장군을 파직을 시켜서 호남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서

나라의 일을 이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이걸 생각하니 심장이 찢어지고

뼈가 녹는듯하다라고 개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의 원판이

이 모양으로 기록이 엉망이 된 것은 이 원판은 광해군때 실권을 잡았던 대북파들이

자신들과 반대되는 당파인 서인,남인파를 철저하게 무능하고 썩어빠진 인물로 매도를

해서 나중에 인조때 권력을 잡은 서인파에서 기존의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의 원판은

공정하지 못한 기록이 많아서 문제가 많으니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의 수정실록을

만들어야겠다고 건의해서 인조의 허락을 받아서 수정판이 나왔는데 거기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평가하는 것과 거의 똑같습니다.

다를 것이 거의 없습니다. 즉, 어느 당파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서 자기네 당파의 잇속만

생각해서 반대 당파들의 인물을 이런 식으로 추잡하게 조작질을 해대서 선조부터 시작해서

광해군,현종,숙종,경종 실록들은 죄다 나중에 수정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수준 이하로 한심한 역사기록을 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조선의 관찬사서들을

포은 선생의 후손인 님이 그렇게 철썩같이 믿으시는 것이 솔직히 너무나 어이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말이죠.

---> 다 맞는 말씀입니다. 오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점이 있다고 해서 전부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식의 곧 들통날 추잡한 거짓말까지 당연하게 일삼는

조선의 역사기록을 너무나 의심없이 곧이곧대로 믿으시는 것은 죄송하지만 삼가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주제넘은 충고라는 것을 알지만 말이죠.

저의 나머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따로 하시겠다고 하시니 그때 님의 글을 읽어보고

다시 답변을 달겠습니다.

이상으로 마칩니다. 그럼..................

---> 기록이 많으면 좋겠지만 별로 없으니까요.
이전글 Re.. 玄逸님. 님의 글에 대한 답변글입니다. 1
다음글 Re..6번부터 10번까지 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