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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Re.. 玄逸님. 님의 글에 대한 답변글입니다. 2
작성자이재우(newtype54@naver.com)작성일2013-09-09조회수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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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뉴타입 89입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고려사 우왕세가.

1377년 6월.


○ 우왕이 도당(都堂)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변방 백성들 가운데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요행히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을 모조리 적의

첩자로 지목해 죽인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정상 당연한 일이거니와 하물며 부모와 처자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귀향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다만 죽일까 겁이 나 적을 따라갔을 뿐이다.

금후로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 모두에게 반드시 상을 내려줄 것이며 실지로 첩자행위를

한 자라도 죽이지 말고 관청에서 생필품과 양식을 주어 살 터전을 마련해 주라.

또한 왜적을 죽이고 돌아오는 자가 있으면 상을 주어 등급을 올려주라. 변방의 고을들에

지시해 이 사실을 알리는 방(榜)을 붙이게 하고 어길 시에는 치죄하라.”



○ 우왕이 재상들에게,

“왜적이 비록 극악한 도적떼이긴 하지만 시체는 묻어주어야 마땅하다. 하물며

강화(江華)와 서해(西海)의 우리 백성 중에 왜적에게 죽임을 당해 그냥 내팽개쳐진 시신이

매우 많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니 내탕(內帑)의 재물을 내어서 매장하는

비용으로 쓰라.”고 지시했다.


고려사절요 우왕세가.

1377년 6월.



○ 우(禑)가 도당(都堂)에 이르기를, “이제 들으니, 변방 백성으로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요행히

도망하여 돌아온 자를 모두 적의 간첩이라 지목하여 곧 죽인다 하니, 대단히 불가한 일이다.

대개 고향을 생각하고 본토를 그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부모 처자가 있는

사람이야 누가 돌아오기를

생각지 않겠는가.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여 적을 따른 것 뿐이다.

이제부터는 도망하여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포상을 더하고, 실지로 간첩이라도

죽이지는 말고 관가에서 물자와 양식을 주어서 살게 하며, 만일 왜적을 베어 가지고

환국하는 자가 있으면 상을 더 주게 하라.

변방 고을에 방을 붙여 보이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죄를 주라." 하였다.



○ 우가 재상에게 이르기를, “왜인이 비록 도적이나 그 시체를 묻어 주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적에게 죽은 우리 강화 및 서해 백성의 시체가 그대로 뒹굴고 있는 것이 매우 많으니,

어찌 차마 볼 수 있는가.

궁내 창고의 돈과 베를 내어, 매장하여 주는 데 쓰게 하라." 하였다.



이상입니다. 얼마나 자비롭고 인자한 왕입니까?

아니 고려의 공적인 원수인 왜구도 일단 죽었으면 그 시체를 묻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또 적국에 끌려갔다가 요행히 탈출한 백성들중에서 실제로 첩자행위를 한 사람이라도 죽이지

말고 생필품과 양식을 주어서 생활을 하게 했다고 하니 말이죠.

자신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한 백성도 내 백성이라고 포용하고 보살펴주는 우왕이 정말로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의 기록대로 과연 포악하고 어리석과 방탕한

왕일까요?

또 강화도와 서해도에서 왜구에게 죽고 난 후에 매장이 되지도 못하고 길가에 버려진 백성들의

시신들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해서 자신의 개인돈인 내탕금(임금의 개인적인 돈.)까지

내려주면서 백성들의 시신을 챙기는 우왕이 과연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의

기록대로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한 왕일까요?

그리고 왜구가 우왕 때 기승을 부리고 그래서 해안가에 위치한 수도 개성이 위험해 처했을 때

조정에서는 내륙의 안전한 철원 지방으로 천도할 것을 거론을 했는데 우왕은 결국 최영의

직언대로 수도 개성을 사수하는 전략을 폈습니다.

이것도 얼마나 용감한 일입니까?

언제 왜구가 수도까지 불시에 들어올지 모르는데 말이죠.

최영은 만약에 도적떼인 왜구가 무서워서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다면 왜구는 더욱

기세등등해져서 고려를 심하게 약탈할 것이기 때문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는 것을 반대했고

우왕도 결국 최영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는 것을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 우왕의 태도도 그렇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을 때 최영은 물론이고 우왕의 반응도 그 어디에도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라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나 고려사,고려사절요등의 관찬사서들에서 말이죠.

왠만한 왕이라면 이런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당연히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왕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왕은 수도인 개성이 이성계 군에게 포위를 당한 상황에서도 최영을 내어 놓으라는

이성계 측의 요구를 거부하고, 끝까지 최영을 보호할려고 했고, 이성계 군에게 결국 패한

최영이 우왕과 최영의 딸로서 우왕의 비가 된 영비가 있는 궁전의 화원으로 가서 있었을 때도

최영을 나름대로 끝까지 보호할려고 했고, 이성계 측이 궁전의 화원을 수색해서 최영을

발견하자 그제서야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이별을 고했다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 이성계측은 최영을 체포해서 유배를 보낸 후 우왕에게 추가로 최영의 딸로서 우왕의

비가 된 영비를 폐위시키라고 요구를 했는데, 우왕은 최영때보다 더 강경한 태도로 영비의

폐위를 반대하면서 만약에 영비를 내쫓는다면 나도 왕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강경하게

버텨서 그래서 이성계측이 그렇다면, 우왕 당신도 영비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를 가라고

해서 우왕은 영비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 이후에 창왕이 잠깐 왕으로 있었지만,

이성계측은 결국 조작된 명나라의 조서를 가지고(명태조 주원장이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아들,자손이니 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명령서를 고려에 보냈다고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에 나오는데 이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상촌집.'을 쓴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은 실제로 명나라에서 그런 조서를 보낸 적도 없는데, 정도전의 무리들이 지멋대로

조작을 해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죽이고, 또 여기에 반대하는 고려 충신들을

귀양을 보내고 죽였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죽였는데,

사실 우왕의 비극은 최영과 최영의 딸인 영비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뭐, 물론 무슨 이유로도 고려왕조를 멸하고 자신의 나라를 건국하겠다고

다짐한 이성계와 그 측근들은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도 결국 우왕을 폐위하고 죽였겠지만

말이죠.

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무식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황제나 왕이 실권이 있는

봉건왕조시대의 황제나 왕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황제나 왕의 자리를

스스로 내놓았다는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우왕의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죠.

그리고 우왕은 무슨 이유로든 결국 이성계 세력에게 폐위당하고 죽임을 당했겠지만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를 지킬려고 왕자리를 포기했고

결국 그것으로 인해서 나중에 죽음까지 당했지만 죽는 순간에도 여기에 대해서

후회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말이죠.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나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 말이죠.

우왕이 죽을 때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이성계측의 요구대로 영비를 내쫓았어야 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라는 것이죠.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역사상 황제나 왕이 그 부인을 가장 사랑한 예의 대표격인

경효왕(공민왕.)의 노국공주 사랑보다도 우왕의 영비 최씨의 사랑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왕은 실제로 영비 최씨를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왕자리에서 물러났고 결국

그래서 죽게 되었는데도 죽을 때 이를 후회하지 않았으니 말이죠.

또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비 최씨도 우왕의 죽음에 통곡을 하면서 우왕의 시신을

바로 매장하지 않고 10일 동안이나 우왕의 시체를 끌어안고 잠을 자서 못다한

정성을 다했고 매장 이후에도 우왕의 제삿날에 정성을 다해서 음식을 장만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나옵니다.

물론 경효왕(공민왕.)도 노국공주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왕위를 포기하고 목숨까지

버릴 만한 왕이라고 인정을 하지만 어쨌든 우왕은 실제로 이걸 실행에 옮겼으니

저는 경효왕(공민왕.)의 노국공주에 대한 사랑보다도 우왕의 영비 최씨에 대한

사랑이 더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왕의 이런 면들을 보았을 때 우왕이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한 왕이라고

주장하는 조선측의 이야기와 우왕이 성군이었다고 자신의 시에서 주장한 원천석의 말중에서

어느 쪽을 믿냐라고 굳이 묻는다면 우왕은 성군이었다라는 원천석의 말을 믿겠습니다.

지금 제가 우왕에 대해서 말한 우왕의 훌륭한 일들은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고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했다라고 말한 조선의 고려에 대한 관찬사서인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고려사,고려사절요에도 나오는 기록이니 말이죠.

만약에 님이 믿으시는대로 포은 선생이 정말로 이런 우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면 포은 선생은 정말로 고려의 역적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한 것도 아니고 또 신돈의 아들이 아니고 공민왕의

아들인데도 이랬다면 말이죠.

그리고 추가로 포은 선생의 성리학의 후계자인 길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길재는 우왕과 창왕이 폐위되고 죽는 것을 보고 이미 고려가 망했다고 판단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지내면서 우왕과 창왕의 죽음을 애도해서 우왕과 창왕의

3년상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이 되면서 얼마후에 공양왕이 죽었을 때는

길재가 공양왕의 죽음을 애도해서 3년상을 치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똑같은 고려의 왕인데 왜 우왕과 창왕의 죽음때는 3년상을 치르고, 공양왕이 죽었을 때는

3년상을 치루지도 않고 공양왕을 섬기지도 않았을까요?

그래서 조선의 양심적인 신료들과 선비들이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자손이 아니라는

중요한 근거중 하나로 길재의 반응을 언급한 것입니다.

실제로 왕씨인 공양왕도 받들기 싫어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간 길재가

만약에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자손이었다면 과연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죽음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평생을 살았겠냐고 말이죠.

그리고 원천석은 그의 시에서 우왕과 창왕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여러 시들을 남겼습니다.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자손이고 또 포악하고 방탕하고 어리석은 왕이었다면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죽음을 안타까워해서 여러 시들을 남겼겠습니까?

이런 점들을 잘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으로 우왕 말년에 최영의 부패한 권문세족 대숙청에 관해서 말하자면

기재잡기의 그 내용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타이겠지요.

만약에 임견미,염흥방,도길부 등의 부패한 고려의 권문세족들의 가족,친척, 또

그들에 빌붙은 사람들을 한 사람당 고작 10명씩만 죽였다고 하면 이성계가 뭐하러

최영에게 이미 썩어빠진 그들의 가족,친척,빌붙은 자들을 모두 죽였으니 더 이상의

고문과 처형은 중단하고 덕정을 펼쳐야 한다고 최영에게 건의를 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십시오.

님이 말씀하신대로 기재잡기의 원문을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본조의 초기[國初]

해평(海平)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호)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세가 대족(世家大族)으로서 그 국가 운명과 시종을 같이한 사람이 어느 시대나 있지마는,

그 중에 선하고 선하지 못한 차이가 없을 수 없는데 둘러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 행사의 옳고

그름은 자세히 살피지 않고 다만 그 대대로 혁혁하게 벼슬과 부귀가 융성한 것만을 보고서,

선하지 못한 자까지 국가의 지주석 같은 신하요, 심복인 신하라고 칭하여, 은연중 그 뽑을

수 없고 움직이기 어려운 있는 사람으로 믿고 있다.”

고 하였다. 고려 말기에 염흥방(廉興邦)ㆍ임견미(林堅味)ㆍ지윤(池奫)ㆍ이인임(李仁任) 등이

함께 조정의 정권을 잡고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해독이 백성에게 흘러가고 화가 종묘 사직에

미쳤으니, 아무라도 다같이 죽여야 했고 반드시 천벌을 받아야 했는데, 최영(崔瑩)이

혁폐도감(革弊都監)을 설치하여 모두 죽이고 제거하자, 한 집에서 죽은 자가 10여 명씩이나

되었다.

그제야 상하가 통쾌하다 하였으며, 조야(朝野)가 서로 경축하였으나, 이후부터는 왕실이

점차 고립되고 우익(羽翼)이 꺾이고 약해져 마침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었다.

목은(牧隱)과 포은(圃隱) 같은 분들의 협조자들이 이숭인(李崇仁)ㆍ김진양(金震陽) 등

몇 사람의 초야(草野)에서 나온 백면서생에 불과할 뿐이었기 때문에, 일이 결국 성취되지

못하고만 것이니, 이 점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인임으로 말하면 자신이 임금을 죽였으니 악의 큼이 염흥방ㆍ임견미와 비교할 바가 아닌데,

그 당시에 이인복(李仁復)ㆍ이숭인이 한 집안의 사람으로 이에 대하여 한 마디의 말도 없는 것은

또 무슨 일이었으며, 명 나라가 일어나고 망해가는 원 나라가 도망하여

흩어짐에 당해서는 그 존망ㆍ승패의 상황이 의리를 따질 것도 없이 분명한 것인데, 도리어

사신을 죽이게 하여(이인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은 것을 말함.) 원 나라 조정을 위하여 충절을

다하는 사람같이 하였으니, 고려 말엽에 원 나라와 장인 사위의 집안이 되어 밀접하게 왕래한

지가 백여 년이 되므로 듣고 보는 데에 오염되어 천리(天吏)와 의주(義主)는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높여야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함이 아닌가? 나라가 바뀔 때의 국사(國史)에 전하는 것이

상세하고 진실하지 못하여 증거 삼지 못할 것이 많으니, 개탄스러울 뿐이다.



이상입니다. 아니, 고려말의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숙청하는데 핵심인물들의 가족 친척을 고작

10여명 죽여놓고 한집에서 죽은 자가 10여명씩이나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습니까?

고작 주모자 한 명에 관계된 사람들을 10여명만 죽였다면 말이죠.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이것은 명백한 오타이고, 그래서 연려실기술의 저자인 이긍익이 이걸 바로잡아서 주모자

한 사람당 관계된 사람들을 1000명씩 죽였다고 정정한 것입니다.

연려실기술에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주모자들의 가족,친척,빌붙은 사람들을 각각 1000명씩

죽였다고 말한 것이 그래서 맞는 말이고 포은선생의 문집인 '포은집.'을 주 자료로 인용해서

'정몽주의 정치활동 연구.'라는 책을 쓴 유경아 박사도 자신의 논문에서 고려말의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최영이 숙청하는 과정에서 주모자 한 사람당 관계된 사람들을 각각 1000명씩

죽였다고 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 수천명이나 죽이고 나서도 최영은 여전히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아직 철저하게

다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계속해서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잔당들과 그들이 등용한

무고한 사람들까지 처벌하고 죽일려고 하자 태조 이성계가

최영에게 이제는 족하니 더 이상 형살을 중단하고 덕정을 펴야한다고 최영에게 건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작해야 수십명 죽여놓고 이성계가 최영에게 이런 건의를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잘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으로 님께서는 조선의 역사 기록이 현대의 대한민국 역사기록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라고 하셨는데요.

대한민국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자료멸실의 경우는 고려를 안 하십니까?

육당 최남선의 경우 우리나라의 고문서들을 수만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포화로

모두 소실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도망가기에 급급한 이승만 정부측이 당시의 정부자료들을 제대로 챙길 여력이나

있었겠습니까?

조선의 경우도 조일전쟁으로 기존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조선왕조실록이 없어졌고

승정원일기의 경우는 완전히 분실이 되어서 다시 편찬을 하지 못했고 또 조선의 주장으로는

왕실 서고에 고려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모조리 없어졌고 심지어 노비에 관한

기록인 노비문서들도 모조리 다 없어졌습니다.

조선왕조실록도 그나마 태조때부터 명종때까지의 실록을 다시 편찬할 수 있었던 것도

전주사고(조선왕조실록은 수도인 한양과 지방 각처에 복사해서 보관을 하고 있었지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을 사고라고 합니다.)가 이순신 장군의 승전과 진주성 싸움의 승리로

인해서 호남지방이 왜적의 침략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히

보전이 될 수 있었고, 이순신 장군의 파직과 진주성의 함락으로 호남도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전주사고도 꼼짝없이 다 없어지게 되었는데 다행히 어떤 한 애국적인 선비에 의해서

사전에 그 선비의 집으로 전주사고에 보관한 모든 조선왕조실록을 옮겨서 보관한 덕에

태조때부터 명종때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을 조일전쟁 이후 다시 편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뭐가 조선의 역사기록이 현대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은 심한 경우 무려 한달 동안이나 왕과 조정 신료들의 행적이 기록이

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선조실록의 정유재란때의 어느 한 기록이 그렇고 광해군의 경우도 어느 경우 광해군과

조정신료들의 행적이 보름 동안이나 기록이 되지 않았는데 이걸 좋은 영화의 소재로 생각해서

상상으로 꾸며서 영화를 만들어서 성공한 것이 바로 '광해. 왕의 남자.'가 아닙니까?

적어도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 기록에서 대통령과 장관들의 회의 내용이나 외국과의 정상회담

내용등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한 달이나 보름동안 기록이 안 되었겠습니까?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고대의 역사는 천재가 연구하고, 중대의 역사는 연구하기 쉽고, 현대의 역사는 체력좋은

사람들이 연구한다.'라는 말 말이죠.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요. 고조선이나 삼국시대 같은 고대의 역사기록들은 너무나 적어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자료들만 가지고는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가 힘들어서 그래서 머리가

대단히 좋은 천재가 고대사를 연구해서 고대사를 밝혀낸다는 뜻이고 조선시대 같은 중대에는

사료들이 적당히 많아서 연구를 하기가 편하고, 현대의 역사의 경우는 자료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 많은 자료들을 일일히 다 보고 연구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현대의

역사는 체력좋은 사람들이 연구한다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치가 이런데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이 현대의 대한민국 정부보다 나을 수도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실 수 있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이 기록의 정확성이나 방대함 면에서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왕조시대의 관찬사서들중에서 기록의 정확성이나 방대함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지, 오늘날의 현대의 정부의 기록들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으로 공정성도 당연히 현대의 기록물이 조선왕조실록보다는 낫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정부의 문서들은 일정한 시간이 흘러야 열람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우린나라의 경우는 30년 후로 법이 정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이명박 정부때 일어난 용산참사의 경우 검찰은 이에 대한 재판에서

이에 대한 자료 1만 페이지 중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인 3천 페이지는 공개하는 것을

거부했다라고 뉴스와 신문에서 보도가 되었지요.

조선왕조실록은 어떻습니까? '함흥차사.'의 사건이나 조선왕조 최대의 만행인 개성의

'두문동.' 사건과 단종과 세조때의 김종서,황보인,사육신 등의 사건들과 예종때의 남이 장군에

대한 기록은 단종과 세조실록,예종실록에서는 철저하게 사실과 다르게 조작만 하고 공정한

기록은 전혀 남기질 않았습니다.

또 조선왕조의 왕중에서 대표적으로 독살이 되었다고 의심받는 왕들인 인종,

소현세자(소현세자는 왕은 아니었지만 세자여서 거의 왕에 가까운 지위라서 넣은 것입니다.),

효종,현종,경종,정조,고종의 경우는 그들 왕의 실록에서 그 어디에도 그들이 독살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소현세자는 인조실록.)그렇다면 조선의 왕들중에서 독살이 된 왕이 그럼 하나도 없을까요?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은 님도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에 비해서 현대의 역사기록물은 정부에게 매우 불리한 기록도 거의 다 사실대로 쓰고 보관은

합니다. 뭐 지금 노무현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 대화록의 경우처럼 예외도

있겠지만 말이죠.

다만 공개를 거부하거나 공개를 한다고 해도 몇 십년 후에 할 뿐이죠.

이런 것들을 보면 조선왕조실록과 현대의 정부의 역사기록물을 비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님은 태종이 태종 말년에 조선왕조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예언서적들과 목은

이색의 목은집 15째 권을 압수해서 없앴다는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라고 하셨는데요.

연려실기술에 이렇게 나옵니다.




○ 17년 임금이 이르기를, “도참(圖讖)에서 나온 말은 의논하는 사람이 모두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 같은 밝음으로도 오히려 도참에 혹한 것은 광무제가 도에

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참서를 불사르지 않아 후세에까지 내려간다면 이치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반드시 깊이 혹할 것이다.

종묘 사직의 화복과 장단을 어찌 이것으로 알겠느냐.” 하고, 좌의정 박은(朴?),지신사

조말생(趙末生)에게 서운관(書雲觀)에 가서 요망하고 허탄하며 떳떳하지 않은 음양에 관한

서적을 모두 불사르도록 명하고, 인하여 서울이나 지방에 요망하고 허탄한 서적을 사사로이

감춘 것은 기일을 정하여 자수하고 관청에 바쳐 불사르게 하였는데, 어기는 자는 고발하게

하고 요망한 글을 지은 자의 법률에 의하여 죄를 주게 하였다.

이색(李穡)의 문집 15째 권도 기일을 정하여 찾아 바치게 하였다. 《동각잡기》 《국조보감》



이상입니다. 이거 찾으실려면 네이버나 다음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이라고 쓰시고 나서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서 오른쪽 위의 란들 중에서 한국고전종합DB란을 누르시고 나서

그 다음에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가 나오면 밑의 그림으로 된 여러 란들중에서

고전번역총서라고 되어있는 그림란을 누르시고 나서 왼쪽의 여러 란들에서 서명별란을

누르시고 그 다음에 가에서 하란이 모두 나오는데 거기서 아란을

눌러서 연려실기술을 찾아서 연려실기술에서

태종조 고사본말에서

태종 이라고 된 소제목을 찾아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목은 이색의 목은집 15째 권은 국조보감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요망한 예언서적도

아니고 고려말의 대학자인 이색의 개인 문집을 없앤다는 것이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부담스러워서 조선조정에서 기록을 안 했겠지요.

국조보감은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같은 조선의 관찬사서이니 말이죠.

이것은 동각잡기를 보면 됩니다.

동각잡기 상의 본조선원보록을 보시면 나옵니다.

원문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영락 정유년(1417, 태종 17)에 명령하여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참서(讖書)를 소각하게

하고, 인하여 서울과 지방에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던 요망하고 허탄한 글들을 기일을 정하여

자수시켜 관청에 납입하여 불태우게 하되, 위반한 자는 누구나 고발하게 하여

요서조작법(妖書造作法)에 의하여 죄를 주게 하였는데, 이색(李穡)의 문집

제십오권(第十五卷)도 날짜를 정하여 찾아 바치게 하였다.



이상입니다. 이것도 찾는 방법은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서 밑의 여러

그림란들중에서 고전번역총서란을 누른 다음에 그 다음에 나오는 홈페이지에서 왼쪽 부분에서

서명별란을 누르시고 나서 그 다음에 가에서 하란까지 중에서 다란을 누르신 다음에 거기서

대동야승을 누르시고 나서 대동야승의 여러 책들중에서 동각잡기란을 누르시고 나서 그 다음에

동각잡기 상,하란 중에서 상란을 누르시고 나서 그 다음에 다시 본조선원보록을 누르시고 나서

그 홈페이지를 쭉 내려가시면 제가 위에서 소개한 동각잡기의 원문이 나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제가 거짓말을 하는지 말이죠.

그리고 다음으로 포은 선생이 이성계를 찬양했다는 시를 님이 모르시는데요. 솔직히

실망스럽네요.

포은 선생의 후손이시고, 또 나름대로 포은선생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를 하셔서 저의 질문글에

여러 개의 답글과 반론글을 다신 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시니 말이죠.

포은선생이 이성계를 찬양했다는 시의 제목과 내용은 이렇습니다.


송헌 이시중 화상 찬.


송헌 이시중의 풍채는 준걸로서 화봉중의 새매요, 지략은 깊고 크거늘 남양의

용(제갈양을 말함.)이라.

더러 정당에서 판결하고 장막에서도 승리를 가르며, 홍류를 막아 창해에 이르고, 해를 이끌어

함지(지는 해가 머무르는 장소.)에서 솟아오르네.

간책(죽간을 말함.)에서 고인을 구하되, 그 어디에도 공에 이를 이 없음이라.



이상입니다. 이것은 신원문화사에서 출판한 목은집,포은집 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고 엮은 이는 구인환 서울대 명예교수이고 말이죠.

가격은 7000원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저는 포은 선생의 이 이성계를 찬양하는 시가 바로 포은집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조선왕조가 개입을 하면서 조작이 되었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조선중기나 후대에 조작이 되어서 추가가 된 것일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포은선생의 원작이라면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 이런 내용이 안 나올 리가

없겠지요.

그리고 다음으로 하여가와 단심가의 문제인데요.

단심가는 포은 선생이 죽은 몇 백년 뒤에 처음으로 나온 것이라서 조작이 되었을 수도 있다.

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님의 개인적인 의견이고, 포은 선생의 단심가는 포은 선생의

작품이라는 것은 우리 역사 학자들에서도 별 이견이 없는 내용이 아닙니까?

또 공시적으로 '포은집.'에 수록이 되었고 말이죠.

'포은집.'은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편찬에 조선왕조가 개입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하여가.'와 '단심가.'가 허구라고 한다면 과연 조선왕조가

'포은집.' 편찬에 관여하면서 이걸 기록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요?

사실, 이 '하여가,'와 '단심가.'는 '하여가.'를 지은 태종 이방원이 초라해지는 내용인데

말이죠.

포은 선생에게 조선왕조 개국에 참여하라고 유혹한 태종 이방원이 포은 선생의 '단심가.'로

단호히 퇴짜를 맞아서 태종 이방원이 머쓱해지고 초라해지는 내용이니 말이죠.

그래서 태종실록에는 이 '하여가.'와 이 '하여가.'에 맞선 포은 선생의 '단심가.'의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종 이방원을 초라하게 만드는 이런 기록이 실제로 있어도 당연히 안 썼겠지요.

그러나 조선 중기나 후기에 들어서는 조선왕조에서도 상당히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를 들어서 김종서,황보인,사육신과 단종의 경우도 숙종과 영조때 공식적으로

복권이 된 것이고 (김종서,황보인,사육신이 충신으로 복권이 되고 단종이 정식 왕으로 복권이

된다고 해서 세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숙종과 영조가 심각한 정통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어서

여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날 확률은 제로에 가까우니 말이죠. 세조때부터 2백년도 훨씬 넘은

기간이니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죠.

'단심가.'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래서 심지어 영조때 조선왕조 최대의 만행인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도 공식적으로 고려의 충신으로 복권이 된 것이고 말이죠. 개성의

'두문동.'의 선비들의 이야기는 그 당시인 태조실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영조의 바로 전의

왕인 경종때까지도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조때 영조가 개성을 방문하면서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의 유적이 있는 부조현을 지나면서 이곳에 대한 유래를 신하들에게 묻자

신하들이 솔직하게 이 부조현이라는 고개는 조선왕조를 거부한 고려의 충신들이 이 고개에서

관복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은거하게 된 고개라는 설명을 듣고, 영조가

공식적으로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을 복권한 것입니다.

조선왕조 최대의 만행인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의 사건도 공식적으로 거론을 하면서 그들을

고려의 충신으로 복권한 것도 그만큼 세월이 오래 흘렀기 때문에 조선왕조에서도 여유가 생겨서

가능한 것이겠지요. 포은 선생의 '단심가.'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심지어

영조때 조선왕조 최대의 만행인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의 경우도 공식적으로 고려의 충신으로

복권을 시킨 것이고 말이죠.

조선왕조 최대의 만행인 개성의 '두문동.'사건의 선비들도 공식적으로 복권이 될 정도이니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와 이에 맞선 포은 선생의 '단심가.'가 '포은집.'에 수록이 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조선조정에서 판단을 했으니 '하여가.'와 '단심가.'가

'포은집.'에 공식적으로 실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와 이에 맞선 포은 선생의 '단심가.'가 사실이 아니고 후대의

조작이라면 조선왕조에서 '포은집.' 편찬에 관여하면서 이러한 시들이 '포은집.'에 공식적으로

수록이 되도록 가만히 두었겠습니까? 이걸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들의 조상을 사실과 다르게 욕보이는 것인데 말이죠.

또 연려실기술의 단종조 고사본말에서 정난에 죽은 여러 신하 라는 소제목에서 박팽년에

관한 기사에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전하면 이렇습니다.


○ 세조가 육신들에게 형신할 때에 김질(金?)을 시켜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노래를 읊어 시험하니, 성삼문은 정포은의 노래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지어 이르되,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 마다

좇을소냐.” 하였다.

[金生麗水라 ?들 물마다 金이 나며 玉出崑崗이라 들 뫼마다 玉이 나며 女必從夫라 ?들 님마다

조츨소냐. 《추강집》


이상입니다.

추강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의 호이니 이미 조선전기에 '하여가.'와 '단심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믿기지 않으시면 연려실기술의 단종조 고사본말에서 정난에 죽은 여러 신하 라는 소제목에서

박팽년에 관한 기사에서 찾아 보십시오.

연려실기술을 어떻게 찾어서 볼 수 있는지는 제가 이번의 제 글의 윗부분에서 이미 이야기를

했으니 더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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