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게시판

게시판

Re.. 玄逸님. 님의 글에 대한 답변글입니다. 3
작성자정선교()작성일2013-09-09조회수1295
파일첨부
거품상자님.
뉴타입54는 뭐고 뉴타입89는 뭡니까? 뭐하시는 분인가요? 네이버에서 찾을 수 없네요
=====================================
■ [거품상자] Re.. 玄逸님. 님의 글에 대한 답변글입니다. 3 (2013-09-09 05:35)
안녕하세요. 뉴타입 89입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정말로 이성계가 최영보다 능력이 더 뛰어나다면 어째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전까지 최영의 지위를 능가하지 못했냐는 저의 질문에 님께서는


제 마음대로 추측하자면 최영은 권문세족 출신이고 병권을 장악한 데다가 나이도 많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아니지요. 최영은 공민왕 시절에 신돈의 모함으로 경주를 다스리는

계림윤으로6년간 좌천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이성계는 공민왕 시절에 승승장구를 했고

그래서 조선왕조실록태조 총서,고려사등을 보면 공민왕은 문에서는 이색, 무에서는 이성계를

썼으니, 나의 사람을 쓰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신하들에게 자부심을 드러냈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즉, 이성계는 최영보다 공민왕에게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왕의 경우 우왕은 아버지와 반대로 최영을 가장 아꼈지만, 그렇다고 이성계를

멀리하거나 소흘히 대하지 않았습니다.

즉, 이성계는 공민왕과 우왕 시절에 단 한 번도 남의 모함이나 왕의 의심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거나 귀양을 가거나 지위가 강등이 되어서 좌천이 되는 식의 불이익을

겪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최영은 신돈이 집권했을 때는 한때 신돈의 모함으로 죽을 위기까지 겪었습니다.

그 후 최영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경주를 다스리는 계림윤으로 6년간 좌천이 되었다가

신돈이 죽고 나서 다시 복귀를 했지만 말이죠.

그러니 최영이 이성계보다 더 공민왕과 우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공민왕은 최영 같은 권문세족들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백성과 나라와 왕을 위협하는 존재로 생각을 해서 말이죠.

그래서 초기에 조일신,기철 같은 부원배 권문세족들을 숙청했고, 그 다음에 노국공주가 죽고

나서 신돈을 등용해서 다른 권문세족들과 잇다른 전쟁으로 인해서 세력이 커진 최영같은

권문세족 출신의 무장세력들을 숙청을 한 것입니다.

공민왕은 죽을 때까지 권문세족들 매우 싫어했고 그래서 권문세족들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최영 조차도 피해를 보았는데 무슨 최영이 이성계보다 더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십니까?

물론 우왕은 이성계보다 최영을 더 총애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계를 절대 소흘히

대접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우왕때 가서야 비로소 이성계도 다른 신하들의 시기를 받아서 모함을 받았지만,

이성계를 각별히 아낀 최영의 보호와 우왕의 이성계 신용으로 인해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전까지 다른 신하들의 참소나 왕의 의심으로 인한 피해를 겪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위에서 능력면에서 최영이 이성계보다 더 낫다라는 것을 이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개성에서 최영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최영에게 2번이나 연전연패 했고 조민수의 도움으로 겨우 최영을

이길 수 있었다고 말이죠.

그리고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을 햇으니 당연히 자신의 집권이 정당하다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인식을 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고려의 무장으로 있으면서 세웠던 전공들을

사실과 다르게 엄청나게 부풀렸을 것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자신이 세운 전공을 실제보다 매우 과장해서 기록을 했을 것이고, 또 어떤 경우는

다른 사람이 세운 공인데 자신의 공으로 가로채서 자신의 공으로 기록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성계의 최대의 업적인 황산대첩도 실제로는 그 수장이

이성계가 아니라 변안열이었다라는 주장도 있고, 또 고려사 최영전을 보면

1380년 나세,최무선의 진포 대첩과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사실은 최영이 장군들을

지휘해서 이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영이 1380년 나세,최무선의 진포대첩과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지휘해서 이겨서

우왕에게 토지를 받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원문을 그대로 올립니다.



우왕이 최영에게 토지를 하사하면서 교서를 내렸다.

“지난해 왜적들이 양광도(楊廣道)와 전라도(全羅道) 깊숙이 침구하자, 경은 장수들을

지휘하여 진포(鎭浦 :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군 성산면)에서 적선을 불태웠으며

운봉(雲峰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전투에서도 승리했으니 산처럼 큰 그 전공을

길이 잊을 수가 없다. 과거 여러 차례 토지를 내려주었으나 경은 모두 버려두고

그 세(稅)를 거두지 않았기에, 이제 부친의 묘소 곁에 있는 고양현(高陽縣 :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의 토지 230결과 장원정(長源亭 :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의 토지 50여 결을

내려주노라.”


이상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나 고려사에서 역대 왕들의 이야기를 다룬 세가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했을 때 최영은 그냥 수도에서 이성계의

승전소식을기다리고만 있었고 이성계가 돌아오자 백관들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며 이성계를 환

영했다라는 식으로밖에 이야기가 안 되는데 왜 고려사 최영전에는 우왕이 최영이 진포대첩과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것을 치하해서 토지를 내려 주었는지 생각을 해 보십시오.

뭔가 의심이 들지 않습니까?

또 고려사 정지전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처음에 왜구 토벌의 총책임자는 최영이었고 그 다음에 이성계였고 그 다음에 정지가 맡았습니다.

정지는 최무선의 도움으로 관음포 대첩에서 대승리를 거두게 되지만, 그 이후에 왜구를 토벌함에

있어서 제대로 된 공을 세우지 못해서 우왕에게 책망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왕은 전의 최영은 배에 화포를 장착해서 왜구를 막아내는 등 주도면밀하게

잘 대응했는데 그대가 왜구토벌의 총책임을 맡고 나서는 이렇다 할만한 성과가 없으니 이것은

그대의 죄라고 책망하는 내용이 나오고, 이에 정지는 사죄를 하고, 또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최초로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해서 왜구를 뿌리뽑자는 건의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최영이 배에 대포를 장착해서 왜구를 막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뭐냐하면은요.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배에 대포를 장착해서 해전에서 상대를 제압한 것이

1380년의 진포대첩이라는 것이죠.

참고로 유럽에서는 1571년에 가서야 레판토 해전에서 처음으로 배에 대포를 장착해서 오스만

투르크 군을 격파했습니다.

유럽보다 거의 200년 이나 앞서서 세계 최초로 배에 대포를 장착해서 적의 전함들을

격파한 것입니다.

육지와 다르게 바다는 심하게 흔들리고, 또 나무로 만든 배는 견고성면에서 한계가 있으니,

대포를 쏘게 되면 당연히 배에 충격과 무리가 가기 때문에, 대포는 일찌감치 개발이

되었어도 배에 대포를 장착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무선이 최초로

배에 대포를 장착해서 진포,관음포 대첩에서 이겼다고 나오는데요.

하지만 고려사 정지전의 이 부분을 보면 실제로 배에 대포를 장착해서 적의 함대들을

격파하자는 아이디어는 최영이 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최무선은 기술자이니, 최영의 이 아이디어를 실제로 실행을 시킨 것일 수도 있고

말이죠.

최영은 모두가 알다시피 결국은 이성계와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최무선은 조선의 건국에

참여를 했기 때문에 최영의 이 아이디어도 최무선의 아이디어로 둔갑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죠.

참고로 고려사 정지전의 그 부분을 제가 그대로 올립니다.



10년(1384),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있을 때 우왕이 환관 김실(金實)을 정지에게 보내,

“도통사(都統使) 최영은 전함을 건조해 해전에 대비하고 화포까지 장착해 주도면밀하게

대응했다. 그런데 경이 해도원수로 있는 요즈음은 왜구가 고을들을 침략해도 소탕하지 못하니

이는 실로 경의 죄다.”

라고 책망하니 정지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13년(1387), 정지가 글을 올려 스스로

대마도 정벌을 자청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왜5)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이끼도[一岐島](지금의 나가사키현[長岐縣] 이끼도[壹岐島])에 웅거해6)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무시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들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신사년 일본 정벌7) 당시 몽고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

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저는 위에서 이성계는 공민왕과 우왕때 다른 신하들의 참소와 왕의 의심을 거의

당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성계가 그럴 가치가 없기 때문에

(즉, 이성계의 능력이 실제로 다르게 매우 많이 과장이 되어서 실제로는 그다지

뛰어난 명장이 아니기 때문에.)다른 신하들의 참소와 왕의 의심을 별로 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최영의 경우 우왕 초에 그동안의 수많은 공로들을 감안해서 사면철권을

내려주는 조처를 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영은 반역죄를 제외한 그 무슨 죄를 지어도 9번까지는 다 용서받고

마지막 10번째로 죄를 지어도 형벌을 감해줄 것이고 이것은 최영뿐만이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도 영원히 적용이 된다라는 분에 넘치는 특권을 내려줍니다.

우왕을 왕에 옹립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이인임 조차도 이 정도로 특별하게

대접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이성계가 태어나서 왕위에 오르기 직전까지의

행적을 적은 부분.)를 보면 이성계가 최영과 같은 이런 식의 특권을 받은

것은 위화도 회군 이후입니다.

공신각에 초상이 걸리고, 또 최영과 같은 사면특권도 받고, 또 어전에서

칼을 차고 들어와도 되고 어전에서 나갈때 뒷걸음으로 나가지 않아도

좋다라는 식의 중국의 전한때 한나라 개국의 3대 공신중 하나인 소하가

한고조 유방에게 받았던 신하가 임금에게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예절을

모두 면제받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나 고려사,고려사절요의 이성계의 전공을 보면

최영보다 더 대단해서 사실 이런 특권들을 위화도 회군 이전에 이미

받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질 못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이성계가 고려의 무장으로 있을 때의 전공은

실제와 다르게 매우 과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것이죠.

이런 점들을 잘 감안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으로 포은 선생의 고려말의 행적에 대해서 사림파 선비들중에서

강직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걸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고 하셨는데요.

여기에 대한 님의 답변은 솔직히 매우 궁색하시군요.

조광조가 포은 선생을 옹호했다고 해서 그것이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포은선생을 해명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조광조 이후로 남명 조식 선생이나 퇴계 이황의 제자인 정구나 기타 다른

사림파 선비들중에서 강직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이 포은 선생을

비판을 한 것이고 말이죠.

퇴계 이황의 제자인 정구는 퇴계 이황의 면전에서 포은 선생을 신랄하게 비판을

했는데 퇴계 이황은 여기에 대해서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게 포은 선생을

옹호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송시열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퇴계 이황과 송시열등은 그저 포은 선생은 무조건 위대하시고 결점이 없는 분이니

포은 선생이 만약에 우왕과 창왕을 왕씨로 여겼다면 어째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냐는 의혹과 만약에 우왕과 창왕이

정말로 신돈의 아들,자손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어째서 우왕과 창왕의 녹을 먹었느냐라는

의혹에 대해서는 무조건 말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제대로 된 윤리와 논리도 없는

억지스러운 포은 선생 옹호를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조광조는 이런 논란에 대해서 그 당시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자손인지,

신돈의 아들,자손인지는 분명하게 안 밝혀졌다라는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와 기타 다른 역사자료들을 종합했을 때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아들,자손이 확실하다라는 것이 조선의 양심적인 신료들과 선비들의 공통된

견해였습니다.

저도 솔직히 처음에는 포은 선생이 혹시 우왕과 창왕이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해서

백성들을 위해서 우왕과 창왕을 폐한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원천석의 우왕과 창왕을

옹호하는 시들과 또 원천석의 '야사.' 6권의 이야기와 또 우왕과 창왕과 공양왕에 대한

길재의 반응과 고려사 우왕세가등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우왕은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한 왕은 아니었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위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김진양은 1392년에 포은 선생의 지시를 받아서

정도전과 조준등을 탄핵하는 상소에서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하고

죄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부분은 퇴계 이황과 송시열의 경우처럼 얼룽뚱땅 넘어갈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게 명백하게 진위가 가려져야 할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포은 선생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말이죠.

이것이 바로 포은 선생의 최대의 결점으로 지적이 되고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제가 달리 생각해 보니 포은 선생은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는데 가담한 적이

없다라고 여러 역사자료들을 보고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나름대로 맞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포은 선생이 우왕 시절에 명나라와 일본을 가는 외교사절을 맡았을 때,

고려사 정몽주전의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이것을 매우 싫어했다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말인데요.

정말로 죄송하지만 님은 여기에 대해서도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궁색한 변호를

하시는군요.

논문 저자가 뭘 과장을 했다라는 것입니까? 이게 과장입니까? 둘 중 하나이지요.

고려사 정몽주전의 이 이야기가 잘못 되었던가, 아니면 '포은집.'에 있다는

이 포은 선생의 시가 진짜 포은 선생의 시가 아니고 잘못 수록이 되었던가 말이죠.

둘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기에 대해서 솔직히 말하면 이 시는 조선중기와 후기때 포은집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사람들이 잘못 알고 '포은집.'에 이런 시를 넣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듭니다.

상식적으로 이성계와 이방원의 정적인 포은 선생을 조선왕조에서 일부로 과장되게

띄울리는 없으니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요.

뭐냐고 하면은요.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을 매우 미워했고, 또 자신의 왕조에 대한 충성심 고취 차원에서

포은 선생을 사실과 다르게 과장되게 띄웠다는 내용 말이죠.

하지만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태조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포은 선생이나 정도전이 원수이기는

다 마찬가지죠.

오히려 감정적으로는 포은 선생이 더 미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포은 선생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와 전 가족을 모두 죽일려고 했고

정도전은 신권주의라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태종 이방원을 세자가

못 되도록 막은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과 자신의 왕조의 충성심 고취 목적에서 포은 선생을 복권을 시키긴 했지만

그도 사람이니, 포은 선생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죽일려고

한 것에 대해서 전혀 미워하는 마음이 과연 없겠습니까?

물론 포은선생이 악독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의 왕조를 지킬려는 충성심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니 어느 정도 이해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분명히 미운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등의 기록을 보면,

조선왕조에서 포은 선생에 대해서 나쁘게 말한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1383년의 과거 시험을 주관하면서 과거부정을 묵인했다고 쓴 것과 또 당시의 원로

재상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열었는데 이때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천하의 간신인

이인임까지 초청해서 잔치를 열어서 당시의 권력자인 이인임에게 아부를 할려고

했다라고 의혹이 들 이야기를 실었고, 또, 포은 선생은 술에 취하면 늘상 고성방가를

했다라는 내용과 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숭인과 더불어 고려왕조실록 편찬의

명령을 받았는데 둘 다 당시 권문세가들의 집에 가서 술이나 얻어 먹으면서, 고려왕조실록

편찬을 게을리해서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또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를 보면 포은 선생이 죽을 때 이미 살 수 없는 상황인데도

구차하게 살려고 2번이나 도망을 가다가 죽었다라는 이야기와 태종 이방원과 포은 선생의

'하여가,','단심가.' 이야기를 삭제를 한 것과 또 포은 선생이 선죽교에서 죽었을 때

흘린 피가 고려사의 최종 수정을 지시한 세종대왕 말년까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들을 전혀 안 쓴 것들을 보면, 결코 조선왕조에서 포은 선생을 사실과 다르게

좋은 쪽으로 과장해서 띄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단점들을 이야기하고 또 이렇게 많은 장점들을 삭제를 한 것을 보면 말이죠.

이야기가 너무 엉뚱한데로 흐른 면이 있는데, 어쨌든간에 포은 선생이 '포은집.'에서

우왕 시절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신활동을 한 것을 실제로는 매우 싫어했다라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나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포은 선생을 기록한 태도들을 보면

일부로 사실과 다르게 좋은 쪽으로 포은선생을 조작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아마도

조선중기나 후기에 '포은집.'이 계속 첨가작업이 이루어지는 마당에서 어떤 사람이

잘못 알고 새로 '포은집.'에 집어넣었을 확률이 크다고 봅니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최영 장군의 경우인데 조선 중기와 후기에 쓰여진

해동악부에서는(해동악부는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계속해서

쓴 것입니다.

마치 '포은집.'이 조선초기,중기,후기에 계속해서 내용이 첨가가 되었듯이 말이죠.)

최영이 요동공격을 핑계로 이성계 세력을 제거할려고 했다라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 그 어디에도 안 나오는 이야기인데

해동악부의 저자가 자기 마음대로 잘못 추측을 해서 최영 장군의 명예를 훼손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면 최영과 결국은 철천지 원수가 된 이성계와 그 후대의 조선왕들이

쓴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등에서 왜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겠습니까?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후대의 조선왕들과 신하들이 전부 다 바보멍청이어서

최영 장군의 이런 음모를 끝까지 눈치를 못채고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에

이런 내용을 안 썼겠습니까?

사람이 바보 멍청이가 아니고 어느 정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자기를 죽일려고

음모를 꾸미면 대개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아는 법입니다.

또 당시에는 몰랐다고 해도 결국 나중에 가서는 어떻게든 알게 되지요.

최영의 이런 음모를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또 후대의 조선왕들과 신하들이 끝까지

전혀 모를 정도로 바보멍청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오히려 고려사 이임전을 보면 권근의 말을 빌어서 최영이 요동공격을 한 목적은 순수하게

우리 고려의 국토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고 나옵니다.

또 고려사 이임전을 보면 권근은 이어서 최영 장군이 그동안 수십년동안 장군과 재상을

겸하면서 한 잘못은 요동공격 이외에는 없었다고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해동악부의 저자가 제멋대로 해동악부에 이런 내용을

실어서 현대의 많은 역사학자들도 최영이 요동공격을 할려고 한 것은 고려의 영토를 지킬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이성계 세력을 제거할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식으로 잘못되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최영 장군이 이런 음모를 실제로 꾸몄다면 이성계 측과 후대의 조선왕들과 신하들이

왜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와 고려사,고려사절요에 이런 이야기를 안 적었겠습니까?

이것과 비슷하게 포은 선생이 중국과 일본을 다니면서 사신으로 활동한 것을 매우 싫어했다라는

이야기는 조선 중기나 후기에 '포은집.'의 내용이 계속 첨가가 되면서 어떤 사람이 잘못 알고

추가를 햇을 가능성이 저는 높다고 봅니다.

만약에 님께서 포은 선생의 이 시는 '포은집.'이 처음으로 간행된 1439년 원판에 나온 시라고

주장을 하실거면 그렇다는 확실한 증거자료와 이걸 볼 수 있는 정확한 출처를 제시해

주십시오.

그러면 수긍하겠지만, 아니라면 저는 제 생각을 지금 시점에서는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후에 저의 생각과 반대되는 확실한 증거자료가 나올 때까지 말이죠.

그리고 다음으로 포은 선생이 우왕 시절에 고려의 원로 재상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열 때

이인임까지 초청한 것에 대해서 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는데요.

정말로 죄송하지만 어이가 없네요.

이인임이 실제로는 고려말의 간신배가 아니라면 몰라도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포은선생이 자신의 잔치에 이인임을 초청한 것은 큰 잘못이 아닙니까?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제가 비유를 든 것에 대해서 님은 이상한 해명을 하셨는데요.

저는 예전의 제 글에서 이걸 비유로 치면 성삼문이 세조 초기에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열면서 동료 신료들을 초대를 했는데 신숙주와 한명회,권람 같은 사람들까지

잔치에 초대한 격이라고 했지, 생육신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생육신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입니까?

저는 분명히 사육신과 신숙주,정인지,한명회,권람 같은 사람들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글을 정확히 읽고 나서 이야기를 해도 해 주십시오.

성삼문이 세조 초기에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열면서 동료 신료들을 초대하면서

신숙주,정인지,한명회,권람 같은 사람을 초대를 한다면 그야말로 어이없는 행동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면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열면서 여러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여기에 이완용까지 초대해서 잔치를 연 것과 이것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정말로 이인임이 고려사의 내용대로 천하의 간신이라면 말이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저의 이 글의 윗부분에서 소개를 했듯이 박동량은 자신의 저서인 '기재잡기.'에서

과연 이인임이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의 내용처럼 이인임이

천하의 간신배인지 의심하는 글을 썼습니다.

이인임이 만약에 천하의 간신배라면 그와 친척이 되는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인

이숭인이 왜 여기에 대해서 아무말도 없었는지(이숭인은 이인임의 친척 이전에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이니 이인임이 정말로 간신배 짓으르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비판이나 지적을 했을테니 말이죠.)또 이인임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원나라는 이미 망했고 원나라의 잔당이 몽골에서 북원이라는 나라를 세워서

겨우 맹맥을 이어가는 처지고, 이에 비해서 명나라는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인데

왜 사서 명나라의 사신을 죽이는 짓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사신을 죽인다는 것은 곧 전쟁도 불사하겠다라는 이야기가 되니

말이죠.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명나라와 전면전을 하면 승산이 없거나 희박할텐데

왜 이인임이 이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도 솔직히 이인임이 과연 조선왕조실록,고려사,고려사절요의 내용처럼

고려말의 천하의 간신배인지 의심이 듭니다.

만약에 이인임이 정말로 고려말의 천하의 간신배라면 왜 최영이 우왕 말년에

단행한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대숙청에서 이인임은 죽이지 않고 귀양만 보냈는지

의문이 들고, 또 고려사 이인임전을 보면 최영이 이인임과 사적으로 친해서

이인임을 살려주었다고 하고 당시 세상 사람들은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늙은 도적을 살려주었다라고 비난을 했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 우왕,최영과 더불어 고려말의 부패한 권문세족들을 숙청하는데

핵심적 역활을 한 이성계가 최영의 이런 처사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최영이 너무 지나치게 부패한 권문세족들과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죽인다고

2차례에 걸쳐서 지적을 한 이성계가 말이죠.

그리고 고려사 이인임전을 보아도 최영의 이런 처사에 대해서 다른 조정의 신료들이나

재야의 선비들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최영에 대해서 이인임을 죽여야 한다고 최영 면전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려의 신료들중에서 말이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드십니까?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 이라는 논문을 쓴 고혜령 씨의 말대로 이성계 측과

후대의 조선왕들과 신료들은 이인임이 우왕 즉위의 일등공신이기 때문에 우왕을

신돈의 아들로 조작한 마당이니, 당연히 우왕을 즉위시키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이인임도

사실과 다르게 조작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억지로 포은 선생을 옹호하실 것이 아니라 이인임은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고려사,고려사절요의 내용처럼 천하의 간신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포은 선생을

진정으로 제대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글이 매우 길어졌는데 이 점은 죄송합니다. 진작에 님의 반론글에 대해서 다시

재반론글을 써야했는데, 이제와서 쓰게 되어서 매우 죄송합니다.

제 글을 잘 읽어보시고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올바르다 싶은 부분은 받아

들이셨으면 합니다. 물론 아니다 싶은 부분은 윤리와 논리에 맞게 다시 재반론을

하셔도 좋습니다.

이상으로 마칩니다. 그럼...............................


이전글 Re.. 日泉님. 답변입니다.
다음글 Re.. 玄逸님. 님의 글에 대한 답변글입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