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선조 연보(圃隱先祖 年譜)

 

○ 고려 29대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6년 정축년(1337) : 포은선생 1세

12월 무자일(戊子日:22일)에 선생께서 영천군(永川郡)의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우항리(愚巷里)에서 탄생하였다.(관본 기록) (신본·개본에는 “12월에 공께서 탄생하였다.” 라고 하였음) 처음에 어머니 변한국대부인 영천이(李)씨가 임신하였을 때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놀라 떨어뜨린 꿈을 꾸고 깨어서 공을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몽란(夢蘭)이라고 하였다.

※ 충숙왕 복위(復位) 내용 : 고려 27대 충숙왕이 1330년에 태자인 정(楨)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제 28대 충혜왕(忠惠王)이 되었다. 그러나 원(元)나라에서 충혜왕이 거칠고 무도하다는 이유로 폐위를 주장하여 1332년에 폐위되고 다시 충숙왕이 제 29대 왕으로 복위하였다.

 

○ 고려 31대 충목왕(忠穆王) 원년(元年) 을유년(1345) :  포은선생  9세

어머니 이씨가 어느날 낮에 꿈을 꾸었는데 검은 용이 뒷 정원의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깨어 나가보니 선생이 그곳에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몽룡(夢龍)이라고 이름을 고쳤고 관례(冠禮) 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 고려 33대 공민왕(恭愍王) 4년 을미년(1355) : 포은선생 19세    

정월(正月)에 아버지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께서 돌아가시매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동안 여묘(廬墓)하였다.

 

○ 공민왕 6년 정유년(1357) : 포은선생 21세

    여름에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이 감시(監試)하였는데 공이 셋째로 합격하였다.

 

○ 공민왕 9년 경자년(1360) : 포은선생 24세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가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한방신(韓邦信)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고시하였는데 선생이 삼장(三場)에서 잇달아 으뜸을 차지하여 첫째로 뽑혔다.

 

○ 공민왕 11년 임인년(1362) : 포은선생 26세

    3월에 예문검열(藝文檢閱)이란 벼슬에 제배(除拜)되었다. 10월에는 수찬(修撰)으로 진급하였다.

 

○ 공민왕 12년 계묘년(1363) : 포은선생 27세

5월에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에 제배되었으며, 7월에 선덕랑위위시승(宣德郞衛尉寺丞)에 제배되었고 8월에 종사관(從事官)으로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을 따라 화주(和州:지금의 함흥)에서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였다.

 

 ○ 공민왕 13년 갑진년(1364) : 포은선생 28세

2월에 여진의 삼선(三善)·삼개(三介)를 패배시키고 돌아와 조봉랑(朝奉郞)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에 제배되고 자금어대(紫金魚帶)를 하사받았다.

 

○ 공민왕 14년 을사년(1365) : 포은선생 29세

전농시승(典農寺丞)으로 옮겼다. 정월(正月)에 어머니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의 상(喪)을 당하매 3년동안 여묘(廬墓)를 하였다.

 

○ 공민왕 15년 병오년(1366) : 포은선생 30세

이때 상제(喪制)가 문란하였으나 선생만이 여묘하여 애례(哀禮)를 갖추어 다하였는데 이런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서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였다.

 

○ 공민왕 16년 정미년(1367) : 포은선생 31세

선생이 복을 벗고나서 통직랑(通直郞) 전공정랑(典工正郞)에 제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곧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 兼 成均博士)에 제배되었다. 이때는 전쟁을 겪은 뒤라 학교가 황폐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성균관(成均館)을 새로 세우고 큰 선비를 가려서 학관(學官)을 겸직시켰다. 이 색(李穡)을 겸대사성(兼大司成)으로 삼았는데, 선생의 강설(講說)이 발월(發越)하여 여느 사람의 생각보다 뛰어나므로 선비들이 탄복하였고 이 색이 자주 이를 일컬어 “달가(達可:포은선생의 자)의 논리는 횡설수설(橫說竪說)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니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대한다.” 하였다.  

 

○ 공민왕 17년 무신년(1368) : 포은선생 32세

봉선대부(奉善大夫) 성균사예 지제교(成均司藝 知製敎)에 제배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제수(除授)에 다 삼자(三字)〔지제교(知製敎) 삼자를 말함〕와 관각(館閣:예문관 춘추관 보문각 홍문관 진현관 성균관 등의 합칭)의 벼슬을 겸대(兼帶)하였다.

 

○ 공민왕 20년 신해년(1371) :  포은선생 35세

중의대부(中議大夫) 태상소경 보문각응교 겸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에 제배되었다. 12월에 중정대부(中正大夫)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제배되었다.

 

○ 공민왕 21년 임자년(1372) :  포은선생 36세

3월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부경(赴京: 京師에 감, 주로 사신이 중국 수도에 가는 것을 말함)하여 촉(蜀)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고 아울러 자제(子弟)의 입학(入學)을 청하고서 돌아오다가 바다 가운데의 허산(許山)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홍사범은 익사하고 선생은 익사할 뻔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말다래(말안장에 매달아 진땅의 흙이 튀는 것을 막는 물건)를 베어 먹은지 13일만에 명나라 황제가 듣고 배를 갖추어 도로 데려가서 후하게 돌보아 주었다.

 

○ 공민왕 22년 계축년(1373) : 포은선생 37세

7월에 선생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명나라 황제의 명을 선포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당 태종때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켰거니와, 지금 왕이 또한 보내기를 청하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다만, 고려는 경사(京師)에서 수륙으로 만여 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부모는 그 아들을 생각하고 아들은 그 어버이를 생각하게 될 것이니, 그 부모가 바라는 것을 들어서 보내라. 또 해마다 몇 차례 조공을 헌납하면 백성을 번거롭히게 되고 행리(行李:使者)가 험난한 바닷길을 왕래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중국의 제후는 천자에게 해마다 한 번 소빙(小聘)하고, 3년에 한 번 대빙(大聘)하였으며, 구주(九州) 밖은 한 세대에 한번 뵈었는데, 이제 고려는 중국에서 조금 가까이 떨여져 있고, 문물예악이 중국과 조금 비슷하므로 다른 번국(蕃國)과 같게 여길수 없으니, 이제부터는 3년에 한 번 조빙(朝聘)하는 예에 따르되 혹 한 세대에 한 번 뵈고자 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방물(方物)은 너댓 벌감의 토산 베(布)만으로 성의를 보이라.” 하였다.

 

○ 공민왕 23년 갑인년(1374) : 포은선생 38세

    2월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 按廉使)에 제배되었다.

 

○ 고려 34대 우왕(禑王) 1년 을묘년(1375) : 포은선생 39세

우사의대부 예문관직제학 충춘추관수찬(右司議大夫 藝文館直提學 充春秋館修撰)에 제배되었다. 곧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제배되었다. 이 때에 공민왕이 시해되고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죽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의리로서 앞장서 아뢰어, “요즘의 변고는 빨리 상세하게 주달(奏達)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알아서 의혹을 없게 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미리 스스로 의심하고 이반하여 백성에게 화를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그제야 비로소 판종부시사 최 원(崔 源)을 보내어 상(喪)을 고하고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이때 마침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옴에 이인임(李仁任)이 맞아들이려 하였는데, 선생이 박상충(朴尙衷)·김구용(金九容) 등 10여인과 함께 상서하여 다투고, 대간도 이인임을 논핵하니 권신들이 “간관이 재상을 논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하여 모두 하옥하여 장류(杖流)하였다. 선생도 죄를 얻어 언양(彦揚)으로 귀양갔다.

 

 ○ 우왕 3년 정사년(1377) : 포은선생 41세

3월에 선생이 서울인 송도(松都)로 돌아왔다. 9월에 전임 대사성(大司成)의 신분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선생의 사행(使行)길을 모든 사람이 다 위태로운 것으로 생각했으나 선생은 조금도 어려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한 일본에 도착해서는 국가간 교류의 이해관계를 들어 설득하자 일본의 위정자들과 승려, 일반인 등이 모두 감복하였다.

 

○ 우왕 4년 무오년(1378) : 포은선생 42세

일본 사신 11개월만인 7월에 선생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이마카와료오슌(今川了俊)이다〕이 주맹인(周孟仁)을 시켜 함께 오게 하고 잡혀갔던 윤 명(尹 明), 안우세(安佑世) 등 수백인을 돌려 보냈다. 정순대부(正順大夫) 우산기상시보문각제학지제교(右散騎常侍寶文閣提學知製敎)에 제배되었다.

      

○ 우왕 5년 기미년(1379) : 포은선생 43세

4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전공판서 진현관제학(典工判書進賢館提學)에 제배되었고 윤5월에 봉익대부 예의판서 예문관제학(奉翊大夫禮儀判書藝文館提學)에 제배되었으며, 10월에 전법판서 진현관제학(典法判書進賢館提學)에 제배되었다.

 

○ 우왕 6년 경신년(1380) : 포은선생 44세

3월에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제배되었다. 가을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전라도 운봉(雲峰)에 가서 왜적을 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11월에 밀직제학 상의회의 도감사 보문각제학 상호군(密直提學 商議會議 都監事 寶文閣提學 上護軍)에 제배되었다. 9월에 첨서밀직사(簽書密直事)에 제배되었다.

 

○ 우왕 7년 신유년(1381) : 포은선생 45세

2월에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 商議會議都監事 寶文閣提學 同知春秋館事 上護軍)에 제배되었다. 9월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옮겼다.

 

○ 우왕 8년 임술년(1382) : 포은선생 46세

4월에 주족금은진공사(輳足金銀進貢使)로 경사에 가는데 요동(遼東)에 이르니 도사(都司)의 차인(差人=使者)이 성지(聖旨)를 적어 보이되 “세공(歲貢)을 수년의 물건을 합하여 한꺼번에 하니 그 뜻이 정성스럽지 못하다.” 하고 입경(入境)을 허가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돌아왔다. 11월에 또 청시사(請諡使)로 경사에 갔다.

 

○ 우왕 9년 계해년(1383) : 포은선생 47세

정월에 선생이 요동(遼東)에 이르니 도사(都司)에서 “들이지 말라는 칙명(勅命)이 있다” 하고 진헌(進獻)하는 예물만을 받고 입경(入境)을 허가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돌아왔다. 8월에 동북면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 다시 이성계를 따라 정벌(征伐)에 나아갔다.

 

○ 우왕 10년 갑자년(1384) : 포은선생 48세

7월에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배되었다. 이때 국가에 크게 말썽이 많아서 황제가 노하여 우리에게 출병하려 하고 세공을 늘려 정하고는 5년의 세공이 약속과 같지 않았다 하여 사신을 장류(杖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성절(聖節)을 축하하러 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눈치를 보고 피하니, 임견미(林堅味)가 공을 천거하였다. 임금이 불러서 면대하여 이르기를,  “경은 고금에 널리 통하고 또 내 뜻을 알거니와 이제 진평중(陳平仲)이 앓아서 가지 못하므로 경으로 갈음하였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매, 대답하기를, “임금의 명은 물불도 피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천자를 뵈러 가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남경에서 무릇 8천리나 떨어져 있으니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것을 덜고도 실로 90일 길입니다. 이제 성절까지 겨우 60일이 남았는데 순풍을 기다리는 열흘을 빼면 남은 날이 겨우 50일이니 이것이 신의 한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느 날에 길을 떠나겠는가?” 하매,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머물러 자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밤낮으로 길을 곱잡아 가서 절일(節日)에 미쳐 표문(表文)을 바치니 황제가 표문을 보고 날짜를 헤아려 보고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 배신(陪臣)이 서로 사고를 핑계하여 오려 하지 않다가 날짜가 닥치매 너를 보냈을 것이다. 너는 전에 촉(蜀)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러 온 사람이 아닌가?” 하매 공이 그때 배가 부서졌던 정상을 죄다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중국말을 알겠다.” 하고, 특별히 위무(慰撫)하고 예부에 명하여 너그러이 예대(禮待)하여 보내게 하였다.

 

○ 우왕 11년 을축년(1385) : 포은선생 49세

4월에 선생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았는데 그때 사람들이 마땅한 선비를 뽑았다고  일컬었다.

 

○ 우왕 12년 병인년(1386) : 포은선생 50세

2월에 선생이 경사(京師)에 가서 임금의 편복(便服)과 배신(陪臣)의 편복(便服)·조복(朝服)을 청하고 이어서 세공을 감면하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선생의 주대(奏對)가 상세하고 명백하여 5년동안 바치지 못한 것과 늘려 청하였던 세공의 상수(常數)를 면제받았다. 7월에 경사에서 돌아와 황제의 명을 선포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세공을 둔 것은 중국이 어찌 이것에 기대어 가멸하려는 것이겠는가? 삼한(三韓)의 성사(誠詐)를 알아보는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표문에 중화(中華)의 제도를 쓰고 오랑캐의 제도를 바꾸겠다고 한 것은 그 임금과 신하가 힘써 행하기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표문에 백성이 크게 어렵다는 것은 사자(使者)가 돌아갈 때에는 짐이 다시 약속하여 세공을 삭제하였거니와 3년에 한 번 조빙(朝聘)하여 좋은 말 50필을 바쳐 종산(鍾山) 남쪽 목야(牧野)의 무리에 보태어, 길이 서로 보수(保守)하라.” 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의대·안마를 내렸다.

 

○ 우왕 13년 정묘년(1387) : 포은선생 51세

청하여 해직(解職)되고 영원군(永原君)에 봉작(封爵)되었다. 6월에 공이 하륜(河崙)·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건의하여 백관(百官)의 관복을 정하여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중국제도를 따랐다. 이때 명나라 사신 서질(徐質)이 와서 보고 감탄하여,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를 따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으며, 12월에 경사(京師)에 가서 조빙(朝聘)을 통하기를 청하였다.

 

○ 우왕 14년 무진년(1388) : 포은선생 52세

정월에 선생이 요동(遼東)에 이르렀는데 들이지 않아서 그대로 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제배되었다. 이때 권간(權奸:권세있고 간사한 신하)이 백성의 전토(田土)를 강탈하므로 청하여 사전(私田)을 폐지하매 백성이 이에 힘입어 살았다. 7월에 문하찬성사 지서연사(門下贊成事 知書筵事)에 제배되었다.

 

○ 고려 35대 창왕(昌王) 원년 기사년(1389) : 포은선생 53세

    6월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제배되었다. 11월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제배되었다.

 

○ 고려 36대 공양왕(恭讓王) 원년 경오년(1390) : 포은선생 54세

8월에 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중대광(重大匡)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 同判都評議使司事 判戶曹尙瑞寺事 進賢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領書雲觀事)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제배되었다. 11월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守門下侍中 判都評議使司兵曹尙書寺事 領景靈殿事 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제배되었다. 이때 국가에 일이 많아서 기무(機務)가 호번(浩繁)하였는데, 선생이 승상(丞相)이 되어 성색(聲色)을 동요하지 않고서 큰 일을 처치하고 큰 의혹을 결단하며 좌우로 수답(酬答)하는 것이 모두 적당하였다. 그 때의 풍속은 무릇 상제(喪祭)에 오로지 불법(佛法)을 숭상하여 기일(忌日)에는 재승(齋僧)하고 시제(時祭)에는 지전(紙錢)만을 진설하였는데, 선생이 청하여 사서(士庶)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본받아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예속(禮俗)이 다시 일어났다. 또 수령을 청망(淸望)이 있는 참상(參上)으로 가려서 시키고, 이어서 감사(監司)를 보내어 그 출척(黜陟)을 엄정하게 하니 피폐하였던 것이 되살아났다. 도평의사사에 경력(經歷)·도사(都事)를 두어 금곡(金穀)의 출납을 치부하고, 서울에는 오부(五部)의 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었으며, 법령을 가다듬어 국가 기강을 세우고, 불필요한 인원을 과감히 도태시키고 준량(俊良)을 등용하고, 호복(胡服)을 폐지하여 화제(華制)를 따르고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을 진구(賑救)하고, 수참(水站)을 두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한 것에 이르러서도 모두 선생의 계획이었다.

 

○ 공양왕 3년 신미년(1391) : 포은선생 55세

    11월에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더 받았다.

 

○ 공양왕 4년 임신년(1392) : 포은선생 56세

2월에 선생이 지은 신률(新律)을 바치니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진강(進講)하게 하였는데 무릇 6일 동안에 여러번 그 훌륭함을 찬탄하였다. 선생이 절의(節義)에 따라서 돌아가시니, 실로 4월 초 4일이었다. 이해 7월에 고려가 망하였다.

 

○ 조선 3대왕 태종 1년(1401)

조선 태종이 명하여 선생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관대제학 겸예문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館大提學 兼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 조선 태종 6년(1406)

오천정씨 족보에 의하면, “선생을 처음에는 해풍군(海豊郡)에 장사하였는데, 이 해 3월 경기 용인현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쇄포촌(曬布村)에 이장하고, 부인 이씨 봉경순택주(封敬順宅主)를 선생과 합장하였다.” 고 하였다.

 

○ 조선 4대왕 세종 14년(1432)

    세종대왕이 명하여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지었는데 선생을 충신전에 넣었다.

 

○ 조선 5대왕 문종 2년(1452)

    문종대왕이 명하여 선생을 마전(麻田:연천)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였다.

 

○ 조선 11대왕 중종 12년(1517)

중종대왕이 태학생(太學生=성균관 유생) 권전(權磌) 등의 상소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들에게 의논하고 명하여 선생을 문묘(文廟=향교)에 종사(從祀)하니, 실로 9월 17일이었다. 또 예관(禮官)에 내려 분묘를 수리하고 초목(樵牧)을 금지하고 비를 세웠다.

 

○ 조선 13대왕 명종 10년(1555)

영천에 사는 선비 노수(盧遂) 등이 부래산(浮來山) 아래에 서원을 세우니, 곧 선생의 구거(舊居)인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매 명종대왕이 편액(扁額)을 내려 임고서원(臨皐書院)이라 하고 또 사서·오경·통감·송감(宋鑑)을 내리고, 이어서 위전(位田)을 두어 봄·가을로 사사(祀事)를 닦게 하였다.

 

○ 조선 14대왕 선조 3년(1570)

개성부에 사는 선비들이 화원 북쪽에 서원을 세우니 또한 선생의 구거인데, 5년이 지난 만력 을해년(선조 8년:1575)에 위에서 전교하기를 “문충공은 동국의 유종(儒宗)인데 더구나 그 절의가 일월(日月)을 꿸만함에랴? 이제 이미 서원을 새로 세웠거니와 내가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고자 한다.” 하였다. 그래서 승지(承旨)를 보내어 가서 제사하게 하고, 편액을 내려 숭양서원(崇陽書院)이라 하고 또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내렸다. 이 해에 도사(都事) 이창(李敞)이 공의 유상(遺像)을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