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선생 신도비(神道碑)

이 신도비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 3번지 포은선생 묘역 아래에 위치해 있다. 전액(篆額)은 조선 현종때의 문신(文臣) 김수항(金壽恒)이 썼고 비문의 글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숙종때의 문신 김수증(金壽增)이 썼다. 1675년 우암이 덕원의 적소(謫所)에 있을때에 비문이 이루어졌는데 1680년 우암이 조정에 돌아와서 자손의 사력(私力)으로는 새겨 세우기 어렵다하여 태학에 붙이고 또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에게  그 일을  주관하기를 청하니 민정중공이 친히 돌을 캐내어 묘소 아래로 들여 보냈으나 1689년 기사화(세자 책봉문제로 우암· 노봉 양인이 삭직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음)가 일어남에 따라 일을 멈추었다.  그  뒤 충렬서원이 비명 새기는 일을 맡아 사인(士人) 이지유(李志儒)· 권포(權誧)와 후손 명한(溟翰)· 문징(文徵) 등이 시종 감동하여 1699년(숙종 25,기묘) 겨울에 세웠다. 비의 크기는 높이 236㎝, 폭90㎝, 두께40㎝이며 글자수는 총 1948자이다. 신도비각(神道碑閣)은 1975년도에 포은선조 묘역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부 보조를 받아 건립하였다. 

 

 

 

포은 정몽주선생 신도비

 

소재지 : 모현면 능원리

연  대 : 조선 숙종25년(1699)

규  모 : 높이 236㎝, 폭 90㎝, 두께 40㎝

 

황명고려수문하시중익양군충의백 포은정선생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치사봉조하 송시열 찬

가선대부동지돈녕부사 김수증 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김수항 전

 

포은선생께서 돌아가신지 2백8십여년이 지난 오늘 선생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은 후학 은진 송시열은 선생의 도덕과 충절을 추모하여 다음과 같이 신도비문을 서술합니다.

천지지간에는 만고불변하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가 상재(常在)하여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존재한다. 그것이 세상에 현현(顯現)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의탁되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실현되어 행하여 질 때도 있고 끊어져 실현을 보지 못하게 될 때도 있는 것이다.  도덕 윤리가 실현될 때는 세상이 밝아지고 실현되지 못할 경우에는 세상이 어두어지는 것이니 사람이 도(道)를 베풀어 세상을 밝게 하거나 사람이 도를 행하지 못하여 세상이 어둡게 되거나 하는 것은 주자(朱子:송나라 6현중의 1인)가 말씀한 것처럼 하늘이 하는 바요 사람의 지력으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과 인륜의 기강을 실현시킬 사람을 내고 안 내고 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선생같으신 인물이 우리나라에 나오시게 된 것은 하늘이 사람을 내신 것이니 이 세상에 도덕과 倫紀(윤기)를 밝게 하기 위함이다.

포은선생께서는 호걸스런 재주가 만중(萬衆)에서 빼어나시고 특출한 자질을 타고나시어 그 섬기신 고려의 국운이 거의 다 기울어 가는 때를 당하여 신하된 의리로써 진충 보국의 도리를 다 하셨으며 정치가로써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정사를 다하신 것은 이미 사기열전에 재록(載錄)하여 있는 바같이 고인으로 더부러 짝이 되시나니 고려에 선생 계심이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다행한 일인가.

선생께서 우리나라에 나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땅에 도덕과 윤리가 밝아질 수 있었으랴. 하늘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선생을 보내신 것이 적실하다.

포은선생 신도비각(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3번지 포은선생 묘소입구 소재)

우리나라가 동쪽으로 멀리 궁벽(窮僻)한 가운데 오랫동안 무지몽매한 오랑캐의 습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주(周)나라 무왕시에 이르러서야 은나라 태사(太師)가 동으로 와서 기자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군장(君長)이 되어 백성을 가르치고 통솔하기 위하여 8조의 계율을 베푼 일이 있게 되었다.

8조계율의 이념은 기자(箕子)의 조상인 설(契)이라는 사람이 순임금의 사도(司徒:당시의 관직명)로 있으면서 오륜을 백성에게 가르친 일을 본 받아 주종(主宗)으로 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후세에 전승되지 못하고 옛 이야기로 남아 2천여년을 지내고서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인륜 도덕이 그 자취가 없어진 것은 그 수수전승(授受傳承)의 길 마저 막혀버렸기  때문인데 이것은 세월과 세대가 바뀜에 따라 더욱 심하게 되었었다.

마침내 문화적으로 뒤진 원나라 세상이 되고서는 가위 사람이 금수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할만 하였으니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인륜도덕은 더 더욱 땅에 떨어져서 혼란과 무질서함이 판을 치니 정말로 바로잡지 않고서는 안 될 지경에 이르렀었다.

이런 때에 선생께서 나오시게 되셨으니 원(元)나라 순제(順帝) 5년 정축(丁丑) 12월 무자(戊子)에 탄생하시고 홍무(洪武) 임신(壬申) 4월 초4일에 선죽교에서 순절하셨다. 처음에 풍덕에 장사하고 그후 태종 6년에 용인군 능원리 문수산 줄기에 진좌술향(辰坐戌向)으로 이폄(移窆)되시었다.

선생의 휘(諱)는 몽주(夢周)요 자(字)는 달가(達可)이시다. 태어나시기 전에 이미 여러 가지 좋은 징조가 있었는데 태어나시어 점점 자라나시매 또한 비범하시어 성현을 사모하여 성학(聖學)에 뜻을 두고 학업을 닦으셨다.

부모상에 모두 여묘(廬墓) 즉 묘소 측근에 여막을 마련하고 거기서 기거하기 3년씩 모두 6년이라는 어려운 상제(喪制)를 마치셨으니 이것은 부모상에 가정에서 예제(禮制)를 마치는 것이 예의의 정도이나 집에서는 범절을 깨끗하게 다하지 못할까 하여 묘소에서 예제를 다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리하여 상례에 있어서 부모가 돌아가셔도 쌀밥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불공 시주하는 묵은 습속에서 점점 벗어나게 하셨다. 이렇게 의관문물 제도를 중국의 제도를 준용하여 야만스럽고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가죽신발이나 비실용적이며 옷자락이 길어서 모양도 비루한 관습을 혁신하셨으니 오랑캐의 누습(陋習)을 중국의 제도로 변하게 하는 조짐이 이런데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글 깊은 뜻을 강론하시거나 넓은 학리(學理)를 설명하심에 있어서는 주자의 학(學)에 근거를 주로 두시고 보통 아무렇게나 하시는 말씀도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없으셨다.

성리학에 대한 고주(古註) 즉 한대(漢代)의 여러 선비들이 알기 쉽게 설명했다는 주석(註釋)이 간혹 요령이 분명치 않아 어리벙벙 애매모호한 것이 있을지라도 선생께서는 이것을 확연히 밝혀서 자칫하면 잘못 이해하기 쉬운 것을 바로 잡으셨을 뿐아니라 강서(江西:陸象山의 頓悟說) 영가(永嘉:陳同甫의 事功說) 등의 학설을 예리하게 파헤쳐 옳은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라고 그 그릇됨을 지적하여 사이비 학이 횡행치 못하게 하셨으니 선생의 이학(理學)이 확연명료함은 마치 물줄기가 백이라도 바다에 모이는 것 같고 별이 천이라도 북극을 에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가정의례에 특히 힘을 쓰시어 사당을 세워 제사의 예를 바르게 하시고 북쪽 오랑캐 원나라와의 친교를 거절하고 의주 명나라와의 교린을 두터이 함을 보이셨으니 공자가 지은 춘추의 법을 밝히신 것이다.

선생의 크고 높고 넓은 유공(遺功)은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세를 내려가도 미혹할 것이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씨조선에 내려와서도 그 학(學)의 연원을 선생으로부터 이어받은 제유대가(諸儒大家)들이 그 학통을 세움에 있어서 그 도학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그 전장(典章)과 문물이 송대의 정주제현(程朱諸賢)의 학을 능가하였으며 은주시대(殷周時代)의 풍습에까지 젖어들게 된 것이 모두 선생을 조(祖)로 한 것인 즉  선생께서  치국(治國) 안민(安民) 진충(盡忠) 성인(成仁)하신 것은 실상 선생의 나머지 일로 여기에 비하면 오히려 작은 것이라 하겠다.

조선왕조 국초부터 선생께 최고의 작위와 문충의 시호를 내리는 등 포숭(褒崇)을 점점 더하여 중종때에 이르러서는 조정암(趙靜菴)을 비롯하여 제현들이 배출하여 더 더욱 선생을 추모 천명하였으며 드디어 문묘에 선생을 배향종사 함은 이조의 열성조가 선생에 대한 숭보의 전(典)이 지극하고 극진함을 알 수 있다. 만약 먼저 문묘에 배향한 설총(薛聰:弘儒侯) 최치원(崔致遠:文昌侯) 안유(安裕:文成公)와 같이 동등 예우를 한다면 뒤에 여론은 만족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말에 우왕·창왕때에는 사기와 빠진 문헌이 많아서 선생의 진퇴하신 의리를 후인들이 혹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나 선생께서는 의리에 정렴(精廉)하시고 인(仁)에 성숙하셔서 인륜의 도리로써 주선하시어 진퇴를 분명히 하셨으니 어찌 뭇사람들이 그같은 대인군자의 행하신 바를 알 수 있으랴. 옛적에 정한강(鄭寒岡)이 선생의 진퇴지의에 대하여 퇴계 이황선생께 물으니 퇴계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허물 있는 가운데서 허물 없기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허물이 없는데서 허물 있기를 구하는 것은 부당하니라」 하셨으니 이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가.

아! 슬프다 선생께서는 국운이 불행하여 고려가 기울어 가는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사직을 지탱하여 진충보국하시다가 선죽교상에 붉은 피를 남기시고 쓸어지시니 그 정충대절(精忠大節)과 부모상을 당하시어 19세때에 그 깊은 산중 묘소에서 6년의 여묘(廬墓)를 치르시어 지극한 예제의 모범을 보이셨으니 그 효성이 또한 크시다. 그러나 뒤를 이어 오랜 세대를 두고 충효에 독실한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니 선생의 충효는 오히려 뒤 사람들의 충효와 그 유(類)를 같이 한다 하더라도 선생께서는 호원(胡元)을 배척하여 멀리 하시고 명나라와의 우의로써 교린(交隣)을 지속하여 종래의 저속하고 비루한 습속을 일신하여 문물제도를 궤도에 오르게하여 중국의 제도를 거의 추급하여 성숙하게 우꿋 가꾸신 것은 선생의 크신 공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노나라 사기 춘추에 보면 현(弦)나라 황(黃)나라 여러 나라가 형초(荊楚) 오랑캐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중국을 배우다가 급기야 멸망하였어도 뉘우치지 않은 자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본다면 중국과의 교린(交隣)이 선생 혼자만의 미적(美績)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오지 선생께서는 유자(儒者)의 학(學)으로써 자임(自任)하시고 학을 함에는 반드시 주자(朱子)의 학으로써 종(宗)을 삼아 뒤에 배우는 후학으로 하여금 다 경(敬)을 주로 하여 학문의 근본을 세우게 하고 궁리하여 아는 것을 지극하게 하고 스스로 반성하여 그 실지를 실천케하니 이 三者가 성학의 주체이며 요령인 줄을 알게 하셨으니 선생의 이보다 더 큰 공은 어디 누구와 더불어 짝할 이 있으랴.

또는 주자 이후로 중국의 도학이 분열되고 갈래가 생겨 양명(陽明) 백사(白沙)의 무리가 황당하고 이해와 납득이 안 가는 학설을 주창하여 공자와 정주지학에 대하여 말하기를 마음 밖에 사리가 따로 없다느니 물욕에 양지(良智)가 가려 지행합일을 못한다는 등의 학설을 내세워 현혹케하여 수사(洙泗:孔子學) 낙민(洛閩:程子朱子學)의 성학(聖學)의 맥이 구름에 가린 듯이 어두어지고 가로막혀서 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니 그 해가 홍수와 맹수의 화보다 심하다 하겠다.그러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택하기를 정(精)히 하고 지키기를 오로지하여 마침내 학이 지분(支分)되고 파별되는 미혹이 없었으니 이것은 오로지 선생의 뒤를 이은 훌륭한 유현(儒賢)들의 공도 있기는 하지마는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선생 말고 다른 누구의 공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유공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전대 후대를 막론하고 여출일구(如出一口)로 선생은 아동이학(我東理學)의 종(宗)이라 말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것은 사림들의 공론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옛적에 문중자(文中子:隋나라 巨儒王通의 諡號)가 공자에게 망극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였는데 이 나라의 선비들은 마땅히 선생에게 망극한 은혜를 입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 참으로 하늘이 이 나라를 위하여 선생 같으신 훌륭한 현인을 내시어 도학의 연원을 열어 끊어진 것을 잇게 하시고 어두운 것을 밝게 하신 것이라 실로 이것이 어찌 범인의 지력으로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선생의 관향은 영일이요 그 상조는 습명이시니 여조때의 명유(名儒)로 관이 추밀원지주사에 이르고 증조는 인수요 조부는 유요 부친은 운관이시니 나라에서 현관의 벼슬을 내리셨다. 선생의 모친은 李씨이시니 서승 약의 따님이시다. 선생께서 두 아드님이 계시니 큰아드님은 종성이요 둘째 아드님은 종본이시다. 세조때에 선생의 손자 보(保:號는 雪谷)는 사육신과 평소에 지기지우(知己之友)로지냈는데 6신의 옥사가 일어남에 공은 항상 비분강개하여 마지 못하던 중 그 의분을 누를길이 없어 마침내 한명회를 찾아 갔다.

마침 공의 서매(庶妹)가 명회의 측실로 있었는데 명회가 집에 없으므로 공이 서매에게 출처를 물으니 6신을 국문하러 대궐에 갔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들 6신을 해하면 만세에 죄인이 될 것이라 하였다. 명회가 듣고 곧 대궐로 가서 세조에게 고하니 임금이 친히 국문하니 공이 말하기를 성삼문 박팽년 등은 항상 정인군자라고 생가하여 왔으며 세상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여기고 있으므로 그런 말을 했다고 하였다.

세조가 대노하여 즉각 환형(轘刑)에 벌하라 하니 임금의 좌우에서 아뢰기를 이 사람은 포은의 손자입니다. 충신의 자손을 가벼이 죽일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급히 환형을 취소하고 명하기를 죽이지는 말라. 영일에 귀양 보냄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런 일로 미루어 보면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아직 충신의 핏줄이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본다.

선생으로부터 세대가 점점 후대에 내려올수록 그 자손들은 떨치지를 못하여 아는 이는 그 후손이 왜 부진한가 이상이 여기더니 근세이래로부터 점점 번창하여 그 가장 현달한 이로는 우의정 유성(維城)과 판중추 응성(應聖)과 인평위 제현(齊賢)과 통제사 익(益)과 통제사 부현(傅賢)과 동지 척(倜) 등이 관로(官路)에 떨치게 되었다.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에게는 관례에 의하여 녹용(錄用)을 더해서 등용하였는데 지금의 상서직장으로 있는 찬광(纘光)이 바로 그 사람으로 선생의 11대손이 된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천사람의 눈을 열어 준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후손에게 영화가 있다 하였는데 그 후손의 현달함을 보게 됨은 이 또한 선생의 영세무궁한 큰 유덕으로 말미암음이라 하겠다.

삼가 선생의 명(銘)을 다음과 같이 짓습니다.

하늘과 땅은 두텁고 넓지만 그 안에는 하나 가득하게 널리 덮인 것이 있으니 곧 자연의 섭리요 하늘의 이치라 가득 충만하여 막혀 있어도 풍기(風氣)의 주선으로 열리고 열리는데도 선후와 차례가 있나니 옛적에 중국의 남쪽이 모두 민(閩)이라는 넓은  땅이  전부 하나의 야만스럽고 미개한 오랑캐의 구역이었는데 여기에 주자(朱子)가 태어나시매 힘입어 공자 노나라처럼 또는 맹자의 추나라처럼 인지(人智)가 깨어나 인륜정도가 행해지는 좋은 지역으로 변하였다.

생각하여 보면 여기 우리나라도 원래는 구이(九夷) 가운데 하나로 미개한 오랑캐러니 기자(箕子)가 팔교(八敎)를 펴서 교화하였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교화의 힘이 점차로 미미하여져서 고려때에 이르러 민도(民度)는 낮고 인지(人智)는 어두어져 그 풍속은 초부(樵夫)가 큰 다발머리를 하고 세상은 아주 상스럽게 되고 말았다.

우리 선생께서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질 무렵에 태산의 모습 같이 우뚝이 태어나시어 스승의 가르침을 받음이 없이 묵묵히  도와 계합(契合)하시어 몸소 닦으시매 선행이 향리에 가득하고 일국에 행하여지니 이에 학풍이 멀리까지 떨치어 학교가 곳곳에 설립되고 교학이 행하여져서 비로소 인지(人智)가 열려 도의 길을 찾게 되었으니 차차로 너도 나도 제사지내는 미풍이 널리 행하여지게 되었다. 선비가 시서를 외우니 백성의 풍속은 새로워지고 당시의 풍습이 호로(胡虜)의 누습(陋習)에 젖어 있었으나 선생은 오로지 중국의 제도를 준용하여 주례(周禮)가 노(魯)나라에 있음과 같았다.  명나라와의 국의(國誼)를 두터이 하고 원나라를 물리침에 어두운 것을 뒤로 하고 밝은대로 향하였으니 춘추의 대의(大義)를 일월처럼 밝게 하셨다.

재조(才操)를 펴서 큰 포부를 다 이루지 못하셨는데 홀연히 나라는 기울어 그 몸은 나라와 함께 가셨으나 세상에 남기신 도(道)는 영원하여 산이라면 태산이 있음과 같고 별이라면 북두(北斗)가 있음과 같으니 대저 선생의 도(道)는 주자의 학(學)을 종(宗)으로 하셨으니 조술(祖述)하고 헌장(憲章)하여 몸소 행하시고 속으로 깨달으셨다. 선생이 장석(丈席:스승의 자리)에 계시어 도(道)에 어긋나는 양명(陽明) 백사(白沙) 등 여러 파의 학설을 배척하셨다.

선생의 말씀은 무엇이고 이학(理學)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 중에는 혹은 의심하여 믿으려 아니하더니 중국의 거유(巨儒) 호씨(胡氏)가 현토해석(懸吐解釋)한 책이 우리나라에 나와서 내용을 고찰하여 본즉 평소에 선생의 논리에 부합치 않음이 없었다. 땅이 멀고 연대가 뒤졌는데도 끊어진 것을 잇는 것 같았다. 선생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속에 깨닫게 함이 흔혈괵봉(痕血摑棒) 즉 주먹으로 때리면 흔적이 있고 몽둥이로 치면 피자욱이 나는 것 같았다.(분명하다는 뜻)

그 후 제현(諸賢)들이 계승하기를 장황(張皇)케 아였을뿐 그 큰 기둥과 줄기는 선생께서 세우셨으니 전대후대를 막론하고  학(學)을 세운 공을 당할 사람이 없다.

송나라의 주렴계(周濂溪)선생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창시하여 장횡거(張橫渠)선생과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선생에게 이어주고 또 주자(朱子)에게 전수하였으니 이는 자못 하늘의 계시임이 분명하다. 1만8백년인 회(會)가 통합되어야 元(12만9천6백년)이라는 종(宗)을 이름과 같이 우리 후학은 인지(人智)를 다하여 학(學)에 힘쓸 것이며 근원을 생각하여 삼가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추기(追記)

여사(麗史)를 살펴보면 선생의 아우이신 당시에 예조판서 과(過)와 사재령 도(蹈) 두분에 대하여 다시 국문하기를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이 대부(臺府)에 청하고 참형하기로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 두분은 선생의 정충대절(貞忠大節)에 이어 조금도 변함 없이 충신은 불사이군지의를 고수하고 죽기로써 맹서하셨으니 5백년 충절의 정기가 모두 정씨일문에 모였다. 이와 같은 사실이 우암(尤菴)께서 서술한 원문에 빠졌으므로 상기(上記)와 같이 추록하오니 뒤 사람들은 고신(考信)하여 주기 바랍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포은선생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은 누구나 존모(尊慕)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후학들을 계개(繼開)하여 주신 공적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혹은 적었으나 우리 우암선생께서 자세하게 모두 수록하여 천양(闡揚)하셨으므로 나는 더 이상 적지 않습니다. 또는 선생의 신도비가 건립한지도 어언 1백년이 지났으므로 다시 무엇을 대망(待望)하랴. 이 대비(大碑)를 세울 때에 노봉(老峯) 민재상(閔宰相) 정중(鼎重)께서 물심양면으로 존모지성(尊慕之誠)을 다 하셨으니 우리 사림(士林)들은 그 극진한 성의를 알아야 할 것이다.

 

숭정기원후 기묘 호조참의 권상하 기 병조참지 김진규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