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부원군 묘소의 사패지(賜牌地)

경북 영천군 아천면(阿川面) 도일동(道一洞) 일대의 산은 일성부원군묘(日城府院君墓) 사패지(賜牌地)인데 자손이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래도록 관리를 못하는 가운데 산 아래에 살던 이기모(李基模=前 監役)외 타성(他姓) 4人이 각각 일부를 점유하여 수목을 기르고 자기 소유를 주장함에 따라 일성부원군 사손(祀孫)인 정원교(鄭元敎·參奉)가 소송을 제기한 뒤  여러해 동안 계속되어 온 송사는 1896년(丙申:建陽元年)에 이르러 매듭을 짓게 되었는데 송사 사실은 확실한 기록이 없고 1896.1월 작성된 완문(完文:조선조때 부동산에 관한 관청의 증명서)과 1896.4.19일 작성된 완문(完文)의 원문(原文)을 복사, 첨부하고 그 원문을 번역 기록하였다. 첨부된 완문내용으로 보아 일성부원군 분묘(墳墓)에 대하여 이(李)씨들이 자기들의 묘역 공사때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다고도 하고, 또 일설(一說)에는 분묘에 시신(屍身)이 없다는 등 터무니 없는 낭설(浪說)들이 전해오는데 이는 전혀 사실 무근임을 밝혀 둔다.

※ 완문(完文)의 원문(原文)은 아래와 같다.

가. 완문1(完文一) 원문(原文)

 

완문1(完文一) 번역문

 

행군수(行郡守)는 완문(完文)을 작성하여 줄 일. 본읍(本邑) 아천면(阿川面) 임고(臨皐) 일국(一局)의 사산(四山)을 빙 둘러 에워 싼 곳은 안으로는 일성군(日城君)의 묘소가 있어서 우리 포은선생이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한 곳이며, 밖으로는 조옹대(釣翁坮)가 있어 또 선생이 평상시에 지팡이를 짚고 신을 끌며 소요(逍遙)하던 곳이다. 전에 신주를 묘향(廟享)하던 곳에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한 당(堂)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모두 정채(精彩)가 있고, 일구일학(一邱一壑) 즉 선생이 살았던 곳은 옛 자취 아닌 곳이 없어서 선생의 숭고한 덕행(德行)은 고금인(古今人)이 함께 우러러 그리워하는 것이므로 결코 타인이 그 사이에 침점(侵占)할 바가 아닌 것이 명확하다. 그런데 뜻밖에 산 아래에 사는 전 감역(監役) 이기모(李基模)라는 자가 말하기를“사매(私買)하여 묘역의 구역 안에서 숲을 기른 지가 오래되었다”라고 하여 선생의 봉사손(奉祀孫)인 전참봉(前參奉) 정원교(鄭元敎)와 상송(相訟)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한번 궁심(躬心)하여 이치에 따라 공결(公決)할 때에 일향(一鄕)의 사림(士林)과 같이 산에 올라가서 살펴보니 이 감역(李監役)은 처음에는 그 사이에 분묘가 없어서 점유한 땅이어서 이편토(片土)를 막지 않고 숲을 기를 뿐이었다 한다. 그런데 그 형편을 살펴보고 사리를 미루어 헤아려보니 마땅히 일성군 묘소의 국내(局內)이다. 그래서 타인으로 하여금 양수(養藪)할 수 없는 곳이어서 본손(本孫)과 합의하기 힘들었다. 부근의 사림(士林)들이 말하기를 수호함을 살피지 아니하고 내지(內地)를 잘못 점거한 지경이니 가히 한탄할 만하다고 하였다.……는 동틀 무렵에 달려있으나, 지금은 무단히 할 수 없다. 나무를 기르는 땅이므로 영원히 일성군 묘소의 국내(局內)에 부치고, 그 나무를 기른 것은 특별히 그간 식양(植養)한 노고가 있으므로 그로 하여금 베어 팔도록하여 절반으로 균분(均分)하도록 하고, 뒷말이 없도록 할 뜻으로 이에 완문(完文)을 2부 작성하여 하나는 영당(影堂)에 두도록 하고, 하나는 본손(本孫)에게 주어 이를 수행하여 영구히 지키게 함이 마땅할 것이다.

 

건양 원년(1896년) 1월

完文

군수(郡守) 印

나. 완문2(完文二) 원문(原文)

 

완문2(完文二) 번역문

 

이는 완문(完文)을 작성하여 줄 일임. 경기 용인 능동(陵洞) 정참봉댁(鄭參奉宅)의 노 수복(奴 守福)의 소(訴)는 다음과 같다. “저의 상전댁(上典宅) 선조인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의 분묘는 영천군 아천면 도일동(永川郡阿川面道一洞) 국내(局內)에 있는데 이는 곧 사패(賜牌)를 받은 땅입니다. 그 사이에 가세가 쇠퇴하여 오래도록 성소(省掃)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부근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 그들이 수호(守護)한다고 하고는 무릇 자기들의 소유물로 인정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상전댁이 관(官)에 정소(呈訴)하기에 이르러 4인을 타재(妥財)하고, 산도국(山圖局)을 전적으로 저의 댁(宅)에 속하게 하고 다시는 딴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오되 인심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훗날에 염려가 있을 듯 하온 바 시촌(枾村)의 이기면(李基冕), 김성학(金成鶴), 이동근(李東根), 신흥업(申興業) 등 4인이 수호하는 고개와 임고동(臨皐洞)에서 수호하는 고개를 역시 저의 댁에 소유권을 줄 뜻으로 특별히 완문을 작성하여 후폐(後弊)를 막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성군의 분소(墳所)는 소중한 바가 특별히 다를 뿐 더러 또 이는 사패지지(賜牌之地)인데 범민(凡民)이 방자하게 수호한다고 하면서 소(訴)에서 사양(私養)한다 함은 극히 무요(無堯)하다. 소위 이기면, 김성학, 이동근, 신흥업 및 임고면에서 수호하는 각 고개는 아울러 전부 사손(嗣孫)인 정참봉댁에 소유권을 부쳐서 다시는 감히 다른 사람들이 차지할 희망을 가지지 못하도록 함이 옳다. 별도로 완문(完文)을 두지 아니하고, 만약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금(禁)한 것을 어긴 경우에는 중률(重律)로 다스릴 것이다. 다시 이같은 금령(禁令)을 멀리 알도록 하여 장차 이 완문을 영구히 준행하도록 함이 의당(宜當)할 것임.

丙申年(1896년) 4월 19일

完文

겸관(兼官) (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