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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선생의 행적에 대한 질문입니다. 죄송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영일
작성자이재우(newtype54@naver.com)작성일2013-07-31조회수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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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의 종친회 회원님들의 정확하고 자세한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아니면 이곳 종친회의 임원 여러분의 정확하고 자세한 답변을 꼭 좀 부탁 드립니다. 잘 아신다면 말이죠. 안녕하세요. 뉴타입 54라는 네이버 회원입니다. 제가 평소에 최영장군과 포은 선생등, 고려말의 고려측 인물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포은 선생의 후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곳 영일 정씨 종친회 사이트에 가입을 했는데요. 사실, 포은 선생은 한국 성리학의 시조이고 또 조선의 사림파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분이지요. 그래서 조선시대에서도 포은 선생의 위치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포은 선생은 조선시대에는 강직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림파 선비들로부터, 또 지금에서는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만 보여서 수구파,위선자라는 식으로 학계에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치인의 경우 김대중 대통령만 해도 포은 선생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제가 방금 위에서 말한 이유로 인해서 말이죠. 그래서 포은 선생의 행적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궁금한 점도 많아서 이곳 영일 정씨 종친회에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잘 아시는 님이나 님들의 정확하고 자세한 답변을 꼭 좀 부탁 드립니다. 아니면 이곳 영일 정씨 종친회의 임원 여러분의 정확하고 자세한 답변을 꼭 좀 부탁 드립니다. 잘 아신다면 말이죠. 제가 이 사이트를 방문해보니 이곳 영일정씨 종친회에서는 포은학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시고, 또 당연히 포은 선생의 후손으로서 조상인 포은 선생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화들에 대해서 많이 아실 것 같아서 질문을 드립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요. 1. 포은 선생이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지금에 와서도 포은선생이 진정한 고려의 충신이 맞냐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은 포은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고 고려사 정몽주전이나 고려사절요, 또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태조 이성계의 조상때부터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직전까지의 행적을 적은 기록.)등이 조선의 관찬사서(황제나 왕의 명령으로 관리들이 공식적으로 쓰는 역사책.)들에서 나오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비록 포은 선생이 한국 성리학의 시조이고 또 조선시대 사림파의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남명 조식이나 퇴계 이황의 제자인 정구같은 강직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선비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고 이 비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포은 선생을 따라다니는 문제점들이죠. 즉, 만약에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이었다면,(조선시대에도 양심적인 관료들이나 선비들은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을 하고 조선조정에서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로 조작을 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했었습니다. 또 오늘날에도 당연히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성계측의 이야기는 이성계측의 조작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고 말이죠.)왜 포은 선생은 자신이 모시던 군주를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냐는 것이고, 또 만약에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면 왜 포은 선생은 가짜 왕밑에서 벼슬을 하면서 그의 녹을 먹었냐는 비판입니다. 물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조선시대에도 양심적인 관료들이나 선비들은 이를 부인하고 역사를 왜곡한 이성계측의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저는 처음에는 우왕이 포악하고 어리석어서 그래서 백성들과 고려왕실을 위해서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지 않았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우왕이 포악하고 어리석인 군주였다면 왜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폐위하고 죽이는 구실로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는 조작을 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를 제거할 때의 명분처럼 그냥 우왕이 포악하고 어리석어서 백성들을 위해서 우왕을 폐위하고 죽였다라고 하면 될 것을 왜 하필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살해의 주 요인을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몰아갔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의 조선의 관찬사서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우왕이 어질고 현명한 왕이었거나 최소한 포악하고 어리석은 왕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왕과 창왕의 마땅한 폐위와 살해 구실이 없었던 이성계측이 궁여지책으로 만든 계략이 아니겠습니까? 우왕이 정말로 포악하고 어리석었다면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살해 명분을 만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고려태조가 궁예를 제거할 때처럼 그냥 우왕이 포악하고 어리석게 정치를 해서 폐위하고 죽였다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말이죠. 진실이 이렇다면 왜 포은 선생은 자신이 10년 넘게 왕으로 섬기던 우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는지 의문이 안 생길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다르게 생각을 해보니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반대를 했는데 이성계측에서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살해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당대 조정의 신료들과 선비들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포은선생을 여기에 같다붙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세조가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을 때 자신의 쿠데타를 인정받기 위해서 당시 조정의 신료들과 선비들과 백성들의 인망을 얻고 있는 성삼문,박팽년등의 사육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김종서와 황보인의 살해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처럼 포은 선생의 경우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성삼문과 박팽년등의 사육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은 세조가 김종서,황보인을 죽인 것을 부당한 반란으로 보았고 그래서 세조가 김종서,황보인을 죽이는데 전혀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성삼문,박팽년등의 사육신들에게 억지로 공신의 지위를 주어서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면을 보인 적이 있지요. 사육신들은 세조가 김종서,황보인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것을 반란이라고 보고 있었지만, 이미 권력이 세조에게 간 이상, 자신들이 여기에 반대해서 사직을 하게 된다면, 위기에 빠진 단종을 지킬 길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조가 주는 공신의 지위를 받고 기회를 보면서 세조를 제거할려고 계획을 꾸민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성계측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있어서 최영 장군 죽음 이후 이색과 더불어 고려의 마지막 기둥인 포은 선생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살해의 정당화를 조정의 신료들이나 선비들이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을려고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포은 선생도 사육신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단 이성계측에 협조를 하는 척을 하면서 기회를 봐서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제거를 하기 위해서 조정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성계측의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목은 이색이나 도은 이숭인이나 원천석 같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고려측 인물들의 저서에도 이런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제가 잘못 아는지는 몰라도 목은 이색이나 도은 이숭인이나 야은 길재나 또 원천석같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고려측 인물들의 저서에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제가 잘못 아는지는 몰라도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는 이야기는 조선의 관찬사서인 고려사,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같은 책들에서만 나오는 것이라서 말이죠. 이때 포은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반대를 했어도 이성계는 포은선생과의 각별한 친분(고려사 정몽주전이나 고려사절요같은 책들을 보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포은 선생의 지혜를 매우 존중해서 자신이 나가는 모든 전쟁터에 반드시 포은 선생을 데리가 갔다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이성계는 목은 이색과도 매우 친했지만 자신이 나가는 모든 전쟁터에 반드시 데려갔다고 하는 포은 선생 정도의 친분은 아니니 말이죠.)각별한 필요성 때문에(제가 듣기로는 이성계는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라고 들었습니다. '이 나라는 양 정이 있어야 받쳐진다.'라고 말이죠. 여기에서의 양 정은 포은 선생과 삼봉 정도전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들었습니다.)설령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는데 앞장을 섰다고 해도 포은 선생과의 각별한 친분과 필요성 때문에 이를 너그럽게 넘어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실제로 고려사 정몽주전을 봐도 공양왕 말년에 포은 선생이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걸 기회로 신속하게 움직여서 정도전,조준같은 이성계의 측근들을 모두 제거할려고 했었고 심지어 이성계까지 죽일려고 했지만, 이것은 태종 이방원의 신속한 대처로 실패로 돌아갔고, 이성계측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서 이성계의 집을 방문한 포은 선생을 이성계는 포은선생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예전처럼 친밀하게 대했다고 나오니 말이죠.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유독 포은 선생을 각별하게 필요로 했고, 또 개인적인 사이도 각별했으니 포은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는데 반대를 했다고 해도 이성계가 이를 너그럽게 넘어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만약에 포은 선생이 정말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면 목은 이색이나 이숭인이나 길재,원천석이나 기타 고려에 충성했던 고려측 인물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안 받았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배신자, 역적 등으로 말이죠. 하지만 저는 제가 잘못 아는지는 몰라도 포은 선생이 이에 관련해서 이색,이숭인이나 길재, 원천석이나 기타 고려측의 인물들로부터 이에 관련해서 비판과 욕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 말이죠. 조선의 강직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신료들이나 선비들,또 지금의 역사학자들도 이런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는 이성계측의 기록을 무조건 곧이곧대로 믿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논리는 제가 고려말과 조선초의 역사에 대해서 쓴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나 조선의 야사 모음집인 연려실기술이나 기타 야사들을 보고 생각해 낸 논리적 추론이니 무조건 100% 맞다고 단정은 못 하겠지요. 저의 이 의견에 의해서 여기 포은선생을 조상으로 모시는 영일 정씨 종친회측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아무래도 포은 선생의 후손이시다보니 님들의 조상이신 포은 선생에 대해서 세상에 안 알려진 일화들에 대해서 많이 아실 것 같고 또 포은선생을 연구하는 포은학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제가 알아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살해 문제에 대해서 실제로는 포은 선생이 이에 반대를 했을 것이라는 저의 이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정확하고 자세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네이버의 한국사 인물 캐스트의 정몽주 편의 댓글에서 이런 내용의 댓글을 단 적이 있습니다. 우왕과 창왕의 폐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포은 선생은 실제로 이랬을 것이다라고 주장을 한 저의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영일 정씨 종친회의 정확하고 자세한 답변을 꼭 좀 부탁 드립니다. 2. 포은 선생의 저서인 포은집이 처음으로 발간이 되어서 여러 차례의 수정,교정 작업을 거쳐서 지금에 이를 때까지 이 포은집을 조선왕조에서 공식적으로 출간을 하는 것에 대해서 지시를 했거나 아니면 출간에 참여를 했는지요? 이상입니다. 즉 포은선생의 저서인 포은집이 처음으로 출간이 되어서 조선시대때 여러 차례의 수정,교정 작업을 거쳐서 지금의 포은집에 이르렀다고 제가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포은집은 조선왕조에서 공식적으로 출간을 지시하거나 혹은 포은집을 공식적으로 출간을 지시는 안 했어도 포은선생의 아들과 후손, 그리고 포은선생을 존경하는 다른 문인들이 포은집을 출간,수정,교정을 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어서 그래서 포은집의 구성과 내용에서 조선왕조의 입김이 들어갔냐는 것입니다. 즉,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포은선생의 저서인 포은집 간행에 조선왕조가 공식적으로 참여를 했냐는 것이고, 또 참여를 했다면 포은선생의 저서인 포은집에 조선왕조의 입김이 들어가서 본래의 포은집의 내용에 조선정부에 불리한 것은 삭제를 하거나 축소를 하거나 또 조선정부에 유리한 내용들은 실제 포은선생이 쓰지도 않은 것을 일부러 포은집에 넣거나(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서.)아니면 실제 포은선생이 조선(이성계와 이방원,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정도전이나 조준이나 남은등.)측 인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쓴 부분들이 있어도 이것을 조작을 해서 조선측 인물들에대한 포은의 찬사를 과장되게 써서 포은집에 인위적으로 넣은 것들이 없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잘 아신다면 구체적인 증거자료들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소개를 해 주시면서 답변을 해 주십시오. 3. 포은선생에 대해서 학자들이 논문을 쓴 것중에 유명한 것이 유경아 박사의 정몽주의 정치활동연구 라는 논문인데요. 이 논문에서 기존의 고려사 정몽주전의 내용과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은요. 고려사 정몽주전에서는 포은선생이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면서 외교관으로서 크게 활약을 했고 포은선생에게 이런 외교적 활동을 지시를 한 당시 고려국왕들과 조정의 명령에 포은선생은 전혀 어렵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또 싫어하지 않고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임한 것으로 써 있는데 유경아 박사는 정몽주의 정치활동연구에서 포은집을 보면 포은선생이 이렇게 외교관으로서 중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것을 매우 싫어한 것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외교관으로 중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그래서 자신의 본래의 임무인 고려조정에서 문신,재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을 원했다고 논문에 나오는데요. 정말로 포은선생이 고려말에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면서 외교관으로서 활약을 한 것에 대해서 이걸 매우 싫어했고 고려 조정에서 하고 싶은 일인 문신과 재상으로 활동을 하길 바랬는지요? 이것 역시 여기에 대해서 잘 아신다면 구체적인 증거자료들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소개를 해 주시면서 답변을 해 주십시오. 4. 위키백과를 보면 포은선생의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을 한 것이 포은선생이 자신의 집에서 최영,경복흥,이인임등의 당시 재상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인 것이 나오는데요. 최영이나 경복흥등은 청렴하고 유능한 재상이니 그렇다고 치고 이인임의 경우는 고려사 이인임전을 보면 완전히 천하의 간신에 인간 쓰레기로 나오는데요. 그러니까 위키백과에서는 포은선생이 우왕 시대의 실권자인 이인임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서 자신의 집에 잔치를 열어서 최영,경복흥,이인임 등의 우왕 당시에 실권을 가진 재상들을 초대를 해서 잔치를 벌였다고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또 이인임과 최영은 고려사를 보면 우왕 초기에 북원과의 관계재개를 추진을 했고 여기에 대해서 포은선생이나 정도전,이숭인,권근 등은 북원과의 관계재개 추진을 결사적으로 반대를 했고 그래서 결국 최영,이인임,경복흥등의 북원과의 관계재개 찬성파들에게 저지를 당해서 포은선생과 정도전,이숭인 등은 모두 유배를 떠났고 이들중에서 박상충과 전녹생은 최영장군의 혹독한 문초때문에 귀양을 가는 도중에 죽었다고 고려사 이인임전에 나오는데요. 상황이 이렇다면 친명파인 포은선생,정도전,이숭인 등은 친원파(?)인 최영 장군과 이인임과는 원수 지간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영과 이인임이 포은선생과 또 포은선생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두 유배보냈고 특히 이중에서 박상충과 전녹생은 최영장군의 혹독한 문초때문에 귀양을 가는 도중에 죽었으니 말이죠. 이치가 이렇다면 당연히 포은선생은 자신과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벌주고 귀양을 보낸 최영장군과 이인임과는 원수지간이 되어야 하는데 포은선생은 나중에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나서 자신의 집에 최영과 이인임을 초정해서 잔치를 얼였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서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영 장군,이인임,경복흥등의 친원파(?)와 친명파인 포은선생,정도전,이숭인,김구용, 권근등의친명파는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서 친명파인 포은선생이 베푸는 잔치에 친원파(?)인 최영장군과 이인임등이 자발적으로 올 이유가 없고 또 포은선생도 자신과 원수지간인 최영장군과 이인임을 자신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를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수지간이니 말이죠. 그런데 고려사 최영전을 보면 포은선생은 자신이 베푸는 잔치에 최영과 이인임을 초청했고 최영과 이인임도 자발적으로 포은선생의 집에 가서 잔치를 즐겼습니다. 그래서 위키백과에서는 포은선생이 우왕 당시의 실권자인 최영과 이인임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서 (특히 이인임의 경우는 고려말 우왕시대를 엉망으로 만든 희대의 간신으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에서 언급이 되고 있으니 말이죠.)자신이 베푸는 잔치에 최영과 이인임을 초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우왕 당시 최영장군과 더불어 가장 실권자였던 재상 이인임은 정말로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내용대로 우왕당시 고려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희대의 간신이 맞냐는 것이고(다른 말로 이야기를 드리자면 이인임은 우왕을 즉위시킨 일등공신이기 때문에 조선정부에서 고려에 대해서 대표적으로 조작한 사례중 하나인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맞추기 위해서 우왕을 즉위시키는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이인임 역시 사실과 다르게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조작,왜곡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제가 들고 또 고혜령 씨가 1981년에 쓴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이라는 논문에서도 나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조선정부는 이인임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작,왜곡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우왕 말년에 이인임 일당의 횡포가 극에 이르자, 우왕이 최영,이성계와 상의해서 이인임 일당을 모조리 체포해서 그들 본인과 가족,친척,등용된 사람들까지 모조리에 가깝게 다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는 숙청작업을 진행을 했는데 여기서 유일하게 이인임만 사형을 면제받고 귀양을 가는데 그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인임 정권에 대한 일고찰.'이라는 논문을 쓴 고혜령 씨는 제가 위에서 말한 이유로 조선정부에서는 우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아들로, 또 포악하고 어리석었다는 식으로 조작을 했고,그래서 우왕 즉위의 일등공신인 이인임 역시 사실과 다르게 철저하게 나쁜 쪽으로 조작, 왜곡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고려 우왕때의 대표적인 간신이 아니었던 이인임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게 나쁜 쪽으로 조작,왜곡만 했고 우왕 말에 우왕과 최영,이성계가 주도한 이인임 일당 숙청작업에 이인임만은 예외로 살려주고 그 가족들도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은선생의 명예와도 관계가 있는 부분인데요. 실제로 이인임은 어떤 사람이었는지요? 정말로 고려말의 간신이었는지 아니면 충신이거나 혹은 충신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재상직을 그러저럭 무난하게 수행이라도 한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또 우왕 즉위 원년에 정말로 최영과 이인임이 포은선생,정도전,이숭인등의 친명파를 귀양을 보냈고 그들중의 두 명인 박상충과 전녹생은 최영 장군의 혹독한 문초로 귀양을 가는 도중에 죽었는지요? 즉, 실제로 포은선생과 이인임은 어떤 관계를 맺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은선생의 명예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말이죠. 이것 역시 여기에 대해서 잘 아신다면 구체적인 증거자료들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소개를 해 주시면서 답변을 해 주십시오. 5. 우리가 흔히 아는 고려말의 고려를 지탱한 두 기둥을 이야기를 하면 최영장군과 포은선생을 들게 됩니다. 그런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썩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왕 즉위 초에 북원의 사신 영접 문제로 대립을 한 것이 좋은 예이겠지요. 하지만, 몇 년전에 최영 장군의 일생에 대한 자료와 유적들을 철저하게 수집하고 현장답사를 해서 최영장군에 대한 책을 쓴 김병섭 교수의 '고려명장 최영의 역사흔적을 찾아서.'라는 책을 보면 김병섭 교수가 직접적으로 쓰진 않았지만, 최영장군과 포은선생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상당히 좋았다는 인상이 듭니다. 또 이 책의 후기에 보면 저자인 김병섭 교수는 이 책을 쓰면서 자료수집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포은 선생의 후손중 한 명인 정동재 씨를 언급을 하고 있고 말이죠. 또 제가 어렸을 때 읽은 이성계 전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포은 선생은 최영 장군이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서 요동공격을 단행할 때, 현장 사령관에 이성계와 조민수를 임명을 하는데, 포은 선생은 요동공격 현장 사령관에 이성계를 임명하는 것을 극력 반대를 했고 또 평소에 최영 장군에게 이성계에게 군권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만류를 했는데 이성계를 매우 아낀 최영장군은 이를 듣지 않고 요동공격의 현장 사령관에 이성계와 조민수를 앞세워 요동공격을 진행을 했다가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해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크게 당황해서 포은선생을 찾아가서 이걸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냐고 묻자 포은선생은 '그러게, 내가 진작에 말하지 않았냐. 이성계는 야망이 큰 인물이라서 그에게 병권을 맡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냐. 왜 내가 하는 말을 진작에 듣지 않아서 이런 사태를 초래했냐.'라는 식으로 최영장군을 나무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금 방금 제가 말한 최영장군과 포은선생의 일화가 정말로 사실인지요? 또 근본적으로 포은선생과 최영장군은 서로 관계가 어땠는지 알고 싶습니다. 기존에 흔히 이야기가 되는 식으로 포은 선생과 최영 장군이 고려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서로 의견의 대립이 심각했고 그래서 포은선생은 외교적으로 친명파에 속했고, 최영 장군은 명나라의 횡포에 맞서서 북원과의 관계개선을 통해서 명나라를 견제할려고 했었고 또 최영 장군이 명나라의 부당한 영토침탈에 반발해서 요동을 공격할려고 했을 때 포은 선생은 요동 정벌은 고려왕조와 백성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행위로 생각해서 그래서 최영 장군을 명장이자 충신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고 또 이성계측에 붙어서 최영 장군을 심문했고, 또 이런 이유들로 해서 최영 장군이 이성계 측에 의해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 때도 최영 장군을 구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어지고 있는데요.만약에 이것이 정말이라면 이곳 영일 정씨 종친회 여러님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하지만 포은 선생이 너무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영 장군의 요동정벌은 너무나 무모해서 백성과 나라에 큰 화를 초래할 사건이라고 생각해서 이성계측의 위화도 회군을 지지했다고 해도 최소한 최영 장군을 구명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올바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영 장군은 장군과 재상으로 수 십년을 있었어도 조금의 사심도 없이 충성된 마음으로 고려말의 고려사직을 잘 이끌었고, 또 위화도 회군 이후 반역을 할 생각을 굳힌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최영 장군을 적극적으로 구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당시 고려에 명장 이성계를 견제할 인물이 최영 장군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최영 장군과의 정책적 대립으로 인해서 최영 장군의 처형을 찬성하거나 방조만 했다면 이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죄송하지만 말이죠.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기록들을 보면 이미 이성계측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부터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진작부터 이들의 음모를 눈치채고 이들을 견제한 이색 같은 사람들과는 달리 왜 포은 선생은 공양왕 초기까지 이성계측을 지지했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갑니다. 고려말의 고려측 문신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포은 선생일텐데 이색과 길재,원천석 같은 인물들도 일찌감치 이성계 일파의 음모를 눈치채고 이를 견제하는 활동에 들어갔는데 왜 포은 선생만 오랫동안 이걸 눈치를 못 채고 이성계측을 지지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의 기록들이 만약에 정말로 사실이라면 정말로 죄송하지만 포은 선생이 너무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위에서 추측한대로 포은선생도 이성계측의 음모를 진작에 간파하고 겉으로는 따르는 척을 하면서 실제로는 좋은 기회를 노려서 이성계와 이성계 측의 사람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을 가졌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았다면 이것은 포은선생이 너무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는 전자를 믿고 있지만 말이죠. 포은 선생과 최영 장군과의 관계와 또 포은 선생이 공양왕 초까지 이성계측과 별 대립없이 친밀하게 지냈다는 식의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이야기에 대해서 여기 영일 정씨 족보에 가입한 영일 정씨 분들과 영일 정씨 종친회의 임원님들의 정확하고 자세한 답변을 꼭 좀 부탁 드립니다. 여기에 대해서 잘 아신다면 말이죠. 6. 포은 선생은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역사책들이나 포은집을 보면, 철저하게 친명파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또, 명나라에 대한 강한 사대의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들 이외에 포은 선생에 대한 대표적인 논문인 '정몽주의 정치활동 연구.'라는 논문을 쓴 유경아 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포은 선생은 최영장군의 인격적인 면과 능력적인 면에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만(즉, 최영장군을 인격적인 면이나 능력적인 면에서 매우 훌륭한 인물로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영의 요동공격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를 했는데, 그 이유는 포은선생이 이성계를 따라서 고려말에 수많은 전장을 다니면서(고려사 정몽주전이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이성계는 포은선생의 지혜를 매우 높게 평가해서 자신이 가는 모든 전장에 반드시 포은선생을 데리고 갔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이 말은 포은선생이 이성계의 장자방이나 제갈양 노릇을 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이성계가 전장에서 작전을 세우는데 포은 선생의 역활이 컸기 때문이겠지요.)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너무나 절실히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나라가 위험해지는 요동공격을 찬성할 수 없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포은선생은 이성계의 손을 들어주었고 또 그래서 최영장군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이성계측에게 죽었을 때도 최영장군을 위해서 변호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가 해동역사에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은요. 전문이 이렇습니다. ○ 25년에 공양왕 4년 고려국의 지밀직사(知密直事) 조반(趙?) 등이 고려의 도평의사(都評議司)에서 올리는 주문(奏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공민왕이 훙한 뒤부터 사자(嗣子)가 없었습니다. 이에 권신(權臣)인 이인인(李仁人)이 신돈의 아들 신우를 세워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으나, 신우는 어리석고 포악하며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여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침범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장 이성계(李成桂)가 안 된다고 하면서 군사를 되돌리니, 왕우가 두려워서 아들인 신창(辛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공민왕의 비 안씨(安氏)에게 계품한 다음 왕요(王瑤)에게 국사를 맡겼는데, 왕요 역시 혼미하여 참언만을 들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왕석(王奭) 역시 어리석고 우매하며 주색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자, 신우의 일당인 현우보(玄禹寶) 등과 몰래 모의하여 다시 신우를 복위시키려고 꾀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문하시랑(守門下侍郞) 정몽주(鄭夢周)는 요동을 공격하려던 음모가 이성계(李成桂)에게 저지당하자, 몰래 왕요에게 참소하여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사직과 생령들을 염려하여 왕요가 백성들을 다스리기에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공민왕비 안씨의 명령으로 왕요를 사저(私邸)로 물러나 있게 한 뒤, 나라 사람들과 기로(耆老)들이 함께 문하시랑(門下侍郞) 이성계를 추대하여 국사를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아룁니다.” 하였다. 이어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바꾸고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고쳤는데, 황제가 모두 따라 주었다. 《사승고오》 이상입니다. 이 사승고오는 중국 명나라 때의 역사책인데요. 포은학회 학자님들이나 이곳의 영일 정씨 후손님들이나 영일 정씨 종친회 임원님들의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이 이야기는 이성계 세력이 포은선생을 죽이고 나서 이를 명나라에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포은선생을 살해한 것을 정당화하고 또 명나라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포은 선생을 죽인 것에 대해서.)꾸며낸 조작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정말이면 고려사 정몽주전이나 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책에 언급이 되지 않을리가 없으니 말이죠. 하지만 고려사 정몽주전이나 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의 역사책들에서는 그 어디에도 포은 선생이 요동 공격에 찬성을 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요. 어쨌든간에 포은 선생은 요동공격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었고, 또 포은선생이 비록 우리나라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라고 해도 철저하게 명나라에게 사대를 하는 입장이었는지 아니면 제가 어렸을 때 읽은 이성계의 전기에서의 최영과 포은선생의 일화나 또 지금 제가 소개한 사승고오의 이야기처럼 포은선생이 최영장군의 요동공격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는지요? 또 근본적으로 포은선생은 정도전처럼 한나라,당나라,명나라 같은 중국 한족이 세운 국가에 대해서, 또 한족에 대해서 자주적인 면을 보였는지 아니면 당시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것도 또 선생 본인의 사상문제도 있고 하여 철저하게 친명사대주의 정책을 취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대해서 여기 영일 정씨 족보에 가입한 영일 정씨 분들과 영일 정씨 종친회의 임원님들의 정확하고 자세한 답변을 꼭 좀 부탁 드립니다. 여기에 대해서 잘 아신다면 말이죠. 7. 포은선생이 태종 이방원과 마지막으로 만나서 '하여가.','단심가.'로 서로의 의중을 확인하고 태조 이성계의 집을 나설 때 이방원은 포은 선생의 마음을 돌릴 수 없으니 심복들을 보내서 포은선생을 제거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포은선생은 태종 이방원의 마음을 진작에 알고, 이성계의 집을 나설 때 말을 거꾸로 타고 선죽교로 가다가 (즉 이때 포은선생은 내가 태종 이방원이 부하들을 보내서 나를 죽일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거꾸로 탔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이때 살기를 포기했다라는 것이죠. 살려고 했다면 일부러 말을 거꾸로 탈리가 없으니 말이죠.) 이방원의 수하인 조영규와 고여등에게 죽었다고 옛날의 경향신문인가의 기사도 그랬고 또 1990년대 태종 이방원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인 KBS '용의 눈물.'과 정난정의 일대기를 그린 '여인천하.'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당연히 쉽게 그 출처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제가 기대를 했는데, 고려사 정몽주전과 고려사절요와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등에는 이 이야기가 없었고, 심지어, 조선시대 야사모음집인 연려실기술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포은선생이 이방원과의 마지막 만남을 마치고 태조 이성계의 집을 떠날 때 자신이 이방원이 보내는 부하들에게 죽을 것을 사전에 알고 자신이 이방원이 보낸 부하들에게 죽는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말을 거꾸로 타고 가다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라는 이 이야기는 어느 역사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사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나 다른 역사서에서는 포은 선생이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들인 조영규와 고여등에게 죽임을 당하실때 먼저 조영규가 포은 선생이 타고 있던 말을 철퇴로 때렸지만, 맞지 않았고 이에 포은 선생은 조영규를 꾸짖은 다음에 말을 달려 도망을 갔고 조영규는 포은선생을 추격해서 철퇴로 포은 선생의 말을 맞추었고 이에 포은 선생을 태운 말이 쓰러지고 포은 선생도 말에서 떨어졌고 포은 선생은 얼른 일어나서 도망을 가다가 고여등에게 잡혀 죽었다는 식으로 포은선생의 마지막을 비겁하고 졸렬하게 매도를 하고 있는데요.(즉, 이미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구차하게 살려고 2번이나 도망을 가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가 말이죠. 물론 세종과 문종때 수정된 고려사 정몽주전에는 포은 선생이 그냥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들에게 죽었다고만 나옵니다. 이미 살 수 없는 상황인데 구차하게 살려고 2번이나 도망을 가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삭제를 했지요.) 이런 조작되고 왜곡된 이야기에(포은 선생이 이런 사람이라면 이미 자신의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제거할려는 계획이 실패해서 이미 대세가 기운 상태에서 '단심가.'를 지어서 태종 이방원의 회유에 단호하게 거절을 하지도 않았겠지요.) 근본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포은 선생이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마지막으로 만나서 '하여가.','단심가.'로 서로의 의중을 확인하고 나서 포은 선생이 이성계의 집을 나섰을때 이미 이방원이 자신의 부하들을 보내서 자신을 죽일 것을 알고 이걸 몰라서 죽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때 일부로 말을 거꾸로 탔다라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경향신문엔가도 언급이 되었고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정난정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인 '용의 눈물.'과 '여인천하.'에서도 나온 이 이야기가 적힌 역사책의 정확한 제목과 그 역사책을 볼 수 있는 방법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가르쳐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8. 포은집에 보면 포은선생이 1392년에 고려왕조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헌법인 신률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기생과 풍악쟁이와 결혼하는 자는 곤장 80대를 때리고 벼슬에 임용되는 것을 막는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내용이 정말인지요? 또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여성 역사에서 여성이 본격적으로 차별이 되고 억압이 되었던 시초가 고려말 공양왕때 신진 사대부들이 이에 대한 법률들을 만들면서 시작이 되었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이 법률들이 제정이 되는데 포은선생이 주도적인 역활을 했다든지, 아니면 주도는 하지 않았지만 이 법률들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서 찬성을 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때 실권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한 포은 선생의 책임도 면할 수는 없겠지요. 고려말 공양왕때 본격적으로 법으로 여성들을 차별하는 법률을 만드는데 포은 선생은 이 법들을 주도적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주도적으로 만들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찬성을 했는지 아니면 이것은 포은선생과는 관련이 없고 당시 신진사대부의 급진파들인 정도전,조준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잘 아신다면 여기에 대해서 꼭 좀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알려 주십시오. 물론 저의 이 질문에 답변을 하실 때 구체적인 증거자료들을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9. 마지막으로 1990년대부터 포은 선생에 대한 비판이 학계에서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포은선생만이 아니라 고려말에 고려왕조에 충성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여기에 해당이 되는 것이겠죠. 문관으로서는 포은선생뿐만이 아니라 이색이나 이숭인과 조의생,임선미 등의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과 기타 고려측 인물들과 또 무관으로서는 최영장군과 변안열등이 있겠지요. 포은선생을 비롯한 이렇게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성을 했던 사람들이 1990년대 와서는 학계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고려왕조에만 충성을 했기 때문에 이들은 수구파이고 위선자라는 식으로 말이죠. 즉, 이런 비판을 하는 학자들은 철저하게 조선의 입장에서만 쓰여진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그리고 조선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정도전과 조준등의 문집만을 보고는 이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요. 저는 애초부터 이 부분이 매우 문제가 많다고 여겼습니다. 만약 저 기록들의 내용이 다 사실이라면 그래서 고려말의 고려의 상황이 도저히 국가유지를 할 수 없는 엉망진창인 상황이라서 백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조선건국을 해서 고려의 모든 잘못되고 부패한 구제도들을 모두 혁파하고 새로운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군사 제도를 만들어야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라는 논리가 되는데 여기에 반해서 유명한 이야기가 고려말과 조선초에 살았던 고려충신중에서 원천석이 철저하게 조선에 의해서 고려말의 상황이 조작이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정확한 사실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 '야사.'라는 이름의 역사책 6권을 만들어서 이를 상자에 넣은 후 후손들에게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또 성인이 아니라면 절대 열어보지 않고 잘 보관하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이 손자때까지는 지켜졌지만, 증손자때에 이르러 증손자들이 상자를 열어서 이 책을 보았고 이 책의 내용이 기존에 조선왕조에서 선전하는 고려말의 역사와 거의 대부분 맞지가 않아서, 이것이 조선왕조에 알려져서 자신들이 처벌을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 책을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또, 조선의 입장이 아니라 고려인이 고려의 입장에서 쓴 고려왕조실록도 지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철저하게 조선의 입장에서만 고려말의 역사를 쓴 고려사, 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나 정도전과 조준등의 문집만을 보고 고려말의 상황을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실정을 감추기 위해서, 또 자신들의 치적을 과장하기 위해서 문서들을 마음대로 조작하거나 폐기하는 사례가 많은데 하물며 봉건왕조시대야 오죽 하겠습니까? 또 요즘 네티즌님들중에서 조선을 매우 못 마땅하게 여겨서(네티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족 자존심과 자주성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아니, 퀘이사로 날려버린{흔히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개념없는 사람을 가르켜 개념을 안드로메다에 버렸다고 하고 더 한심하게 개념없는 사람은 지금 지구에서 가장 먼 천체인 퀘이사로 보내 버렸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여기에 쓴 것입니다.} 정신나간 사대주의 {세상에, 자기 나라의 국호를 정하는데 있어서 자기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 어떤 국호를 썼으면 좋겠냐고 묻는 나라가 세상에, 조선왕조 말고 어느 나라가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또 신라의 경우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대주의를 취한데 반해서 조선의 경우는 진심으로 우리는 중국 한족과 한족이 세운 왕조를 섬겨야 한다는 정신나간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세조편을 보면 세조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한 우리의 자주적인 역사책들인 고조선비사,조대기,삼성기,삼성밀기등의 역사책을 모두 수거해서 없애버리는 정신나간 짓도 하는 것이겠죠.} 또 성리학만을 신봉해서 다른 학문과 사상,종교를 탄압한 것, 또 중국의 송나라가 반란의 우려만 생각해서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문치주의를 택해서 송나라는 왕조가 이어지는 내내 요나라,서하,금나라등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결국 원나라의 공격으로 나라가 망한데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고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저 반란의 위험성만 생각해서 문치주의를 택했고 이렇게 문치주의로 인한 국방력의 약화로 일본과 청나라 등의 공격을 받아서 시달리다가 결국 일본에 병합이 되는 어이없는 짓을 하게 되었지요. 또 조선은 경제개념에 있어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멍청한 짓을 벌여서 무조건 절약을 해야 나라가 산다라는 병적인 절약정신을 내세워서 거의 소비를 할려고 하질 않으니, 당연히 새로 생산하는 것이 없어지고, 또 삼국시대,남북국 시대,고려시대와 달리 외국과의 무역은 전혀에 가깝게 하지 않고{삼국과 신라,발해,고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말이죠.} 또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억상중농 정책을 취해서 결국 조선의 경제규모는 상상을 초월하게 작아졌고 그래서 태종때 일본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는데 처음에 이 코끼리는 경기도에서 먹였는데 경기도 관찰사가 중앙조정에 보고하기를, 이 코끼리가 하루에 먹는 사료의 양이 너무나 많아서 감당을 하기 힘드니 각도에서 번갈아 가면서 기르자는 이야기를 했고 태종이 이를 허락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 코끼리 한 마리를 한 도에서 못 먹여살려서 각도에서 번갈아 가면서 코끼리 한 마리를 먹인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나 되는 소리이겠습니까? 일본이나 동남 아시아에서 코끼리 100마리를 들여왔으면 아주 나라가 망할 뻔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제가 몇 년전에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국사를 연구,편찬하는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 했던 질문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은 당대 조선의 최고 부자인 변씨를 찾아가서 1만냥을 빌린 다음에, 이 돈을 바탕으로 양반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을 매점매석을 해서 나중에 몇 배로 돈을 더 불린 다음에, 이걸 바탕으로 당시 도둑들을 데리고 한 기름진 섬으로 데려가서 농사를 시키게 하고 이 섬에서 곡식이 넘쳐나게 되었을 때, 마침, 일본 나가사키에 큰 흉년이 들어서 일본 나가사키에 곡식을 팔아서 100만냥의 돈을 얻게 되었는데, 허생은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100만냥의 돈은 조선에서 통용이 안 되니 50만냥은 바다에 던져버리고, 나머지 50만냥만 가지고 조선에 돌아와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돈을 쓰고 10만냥을 남겨서 이걸 자신에게 처음으로 돈을 빌려 주었던 변씨에게 돌려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당시 조선은 일본의 한 대도시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또 태종때의 코끼리 사건도 있고해서 제가 국사편찬위원회에 조선의 경제력이 정말로 일본의 대도시 하나만도 못했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조선의 영조 어느 한 해의 중앙정부의 곡식보유량이었는데 18만석이 넘는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그저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영조때로부터 1100년전인 삼국시대때 당태종이 고구려의 요동성을 함락을 시켰을 때 요동성에 비축이 된 곡식의 양이 50만석이었으니 말이죠. 삼국시대의 고구려 말기의 대도시인 요동성의 곡식보유량보다 1100년뒤의 조선의 중앙정부의 곡식보유량이 18만석이 넘었다고 하니 삼국시대 고구려 말기의 대도시인 요동성의 곡식보유량의 절반도 안 되는 곡식을 1100년 뒤의 조선의 중앙정부가 보유했다고 그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극도로 절약을 강조해서 소비를 전혀에 가깝게 안 할려고 한 것, 또 삼국시대,남북국 시대,고려시대에 비해서 외국과 전혀에 가깝게 무역을 하지 않고 또 극도의 억상중농 정책으로 인한 결과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조선은 경제개념도 상상을 초월하는 멍청한 짓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고려왕조가 1000년을 이어져 내려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생각을 해 봤고 말이죠. 물론 이것은 모든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생각은 아니고 또, 상당히 무리가 있고, 또 가장 좋은 안은 고려도 조선도 아닌 정말로 바람직한 개념들을 가진 제 3의 왕조가 나오는 것이겠지만(중국한족에 대해서 자주적이고, 경제개념들도 제대로 갖추고, 국방력도 제대로 갖추고 또 조선의 유일한 장점인 학문도 제대로 발달시키는 왕조 말입니다. 뭐, 고려도 학문적으로는 업적들을 남기긴 했지만, 조선에 비해서는 학문의 업적이 훨씬 적은 것은 사실이니 말이죠. 물론 고려의 학문은 고려중기 무신란과 잦은 외국의 침략때문에 고려의 학문적 업적들이 많이 없어져서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죠.)하지만,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니, 이렇게 개념없는 조선왕조가 생기는 것보다는 그래도 개념은 갖추고 있는 고려왕조가 1000년을 이어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것이 요즘 많은 네티즌님들의 생각이고 저도 이런 생각을 한 바가 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 포은선생을 비롯한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 대해서 조선에 대해서 맹목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에게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있는데요. 고려학회도 그렇고 포은학회도 그렇고, 또 포은선생의 후손들의 모임인 이곳 영일 정씨 종친회에서도 진정으로 포은선생을 생각을 하신다면, 포은선생이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조선건국을 거부했다라는 조선을 맹목적으로 믿는 역사학자들의 의견에 제대로 된 자료들과 논리들을 갖추어서 반박을 해야 진정으로 포은 선생이 단순히 고려왕조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백성도 생각해서 조선건국을 반대했기 때문에 포은선생은 진정한 충신이었다라는 논리도 성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없다면, 앞으로도 포은 선생은 고려말기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조선을 맹목적으로 믿는 학자들이나 문학가,네티즌들에게 비판을 계속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이런 것들을 감안하고 심도있는 연구를 하시고 계신다면 다행이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저의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서 정말로 조선건국이 최선이고 올바랐는지에 대해서 이곳 영일 정씨나 포은학회나 고려학회등에서 심도있는 연구와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영일 정씨 종친회에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여기에 대해서 영일 정씨 종친회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자세한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10.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미 제가 위에서 소개를 했는데요. 이성계는 정몽주의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해서 자신이 참가하는 모든 전쟁터에 포은선생을 반드시 데리고 갔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은 선생은 비록 문인이지만 전략에 매우 능해서 이성계의 장자방이나 제갈양 노릇을 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이성계가 전략을 세우는데 매우 큰 역활을 해서 이성계가 매번 전쟁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포은선생을 데리고 나갔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포은 선생은 전략에도 매우 능한 분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 정도로 전략이 뛰어나다면 포은선생도 혹시 삼봉 정도전처럼 병법서라도 쓰질 않았나는 생각이 듭니다. 삼봉 정도전은 명나라 공격을 염두에 두고 '진법.'이라는 병법서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혹시 정도전처럼 포은 선생도 병법서를 만들었거나 아니면 그렇지는 않더라도 군사전략에 있어서 이성계와 고려조정에 많은 건의들을 했을 것 같은데요. 이런 자료들이 있는지 포은학회나 포은 선생의 후손들이시라서 아무래도 포은 선생에 대해서 다른 세상 사람들보다 많은 일화들을 알고 계실 영일 정씨 종친회의 공식적인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또 포은 선생과 완전히 같은 경우는 아니겠지만. 조선의 김시습의 일화도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요. 조선의 야사모음집인 연려실기술을 보면 김시습은 생전에 수만편의 시를 썼다고 합니다.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는 평생 1천 4백수 정도의 시를 썼는데 포은 선생의 스승인 이색은 제가 듣기로 8천수의 시를 썼다고 하고 조선의 김시습은 수만편의 시를 썼다고 하니 그 양이 엄청난데요. 그런데 김시습의 경우는 자신이 그 많은 시들을 썼지만 자신의 실력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을 좋아하질 않았고 그 시들을 제대로 보관도 하지 않아서 없어지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김시습의 시를 자기 시로 조작해서 발표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포은 선생의 경우는 김시습과는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포은선생이 간신으로 몰려서 죽었을 때 포은선생의 저작인 포은집은 거의 다 없어져서 남은 것은 원래의 포은집의 100분의 1밖에 안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원래 포은선생의 저술인데 후에 조선이 건국되면서 포은선생의 저술을 다른 사람들이 이걸 조작해서 자신의 저술로 한 것은 전혀 없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논문표절이나 짜깁기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례들이 전혀 없었는지 혹은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곳 영일 정씨 종친회에서 잘 아신다면 정확하고 자세한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글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이상으로 마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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