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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玄逸님. 님의 글에 대한 답변글입니다. 1
작성자이재우(newtype54@naver.com)작성일2013-09-09조회수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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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품상자] Re.. 玄逸님. 님의 글에 대한 답변글입니다. 1(2013-09-09 05:00)


안녕하세요. 뉴타입 89입니다.

玄逸님. 님의 반론글에 대해서 이제야 글을 쓰게 되어서 우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진작에 쓸려고 했는데 글이 등록이 안 되어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지금에서야

다시 님의 글에 반론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정말로 죄송하고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요.

제가 님에게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태조 이성계의 조상때부터 태조 이성계가

태어나서 왕이 되기 직전까지의 행적을 적은 기록.),고려사,고려사절요 등의 철저하게

조선의 입장에서 쓰여진 고려에 대한 기록을 너무 신뢰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을

했는데 님께서는


이들 사서를 참조하지 않으면 역사 논의가 불가능해집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이미

관찬사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자기가 찬동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찬사서를 인용하고, 부정하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면서

부정한다면 결국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일관성이 결여된 태도가 되고 맙니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님은 제가 먼저 번에 올린 글에 대해서 반론하는 글의 밑의

부분에서 조선왕조실록이 당쟁이 시작이 된 선조이후로는 실록을 쓸 당시의 집권당에

의해서 자기 당파 사람들은 사실과 다르게 좋은 쪽으로 조작이 되어서 나오고 반대

당파의 인물들은 사실과 다르게 나쁜 쪽으로 조작이 되어서 나오는 사례가 속출을 해서

선조,광해군,현종,숙종,경종의 경우 수정실록들이 나왔습니다.

제가 이것이 바로 조선의 역사책이 공정성 면에서 엉망인 경우가 많고(물론 올바른

경우도 많겠지만 말이죠.)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이야기가 맞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님도 님의 답변글에서



다 맞는 말씀입니다. 오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점이 있다고 해서 전부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인정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시대때 고려에 대해서 쓰여진 관찬사서들인 고려사,고려사절요는

무조건 사실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도 이렇게 공정성 면에서 엉망진창인 부분이 많은데 말이죠.

꼭 당쟁이 시작된 선조 이후가 아니더라도 단종과 세조때 김종서,황보인,사육신 등이

억울하게 간신,역적으로 단종실록,세조실록등에서 매도가 되었다가 결국 나중에

숙종과 영조때 가서 이들 사람들이 모두 충신으로 공식적으로 복권이 되었고

세조때의 명장 남이 장군과 성종과 연산군때의 김종직과 김일손,중종때의 조광조,

선조때의 김덕령,그리고 영조때는 심지어 조선왕조 최대의 만행인 개성의

두문동 사건(태조 이성계때 조선에 반대한 고려의 관리, 유생들이 개성외곽의

한 산에 두문동을 만들어서 그곳으로 들어가서 조선왕조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고

이에 이성계는 민심의 악화를 우려해서 그곳을 포위하고불을 질러서 개성의 두문동의

선비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사건 말이죠.)의 선비들조차 공식적으로 고려의

충신으로 복권이 되었습니다.

물론 영조실록을 보면 조선왕조가 개성의 두문동을 포위해서 불을 질러서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큰 만행이라서 말이죠.

대신에 이런 조선왕조의 만행은 쓰지 않고 단지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이 조선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개성의 두문동에 들어가서 은거하면서 평생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서 이들을 고려의 충신이라고

복권을 하고, 그래서 이들을 추모하는 사당도 세워주고, 또 개성의 두문동 선비들의

자손들을 찾아서 등용시키는 조처도 취했습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비해서는 그나마 공정하게 쓸려고 많이 노력한(고려사,

고려사절요와는 달리 조선왕조실록은 왕과 조정의 신료나 재야의 선비들이 일절 볼 수

없도록 조처를 했었지요.

단지 조선왕조실록을 쓰고 관리하는 담당자들만 볼 수 있도록 조처를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반해 고려사,고려사절요는 널리 인쇄를 하고 배포를 해서 세상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조처를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조차 이렇게 공정성 면에서 엉터리인 부분이 많았는데, 하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오죽 하겠습니까? 철저히 조선의 입장에서 쓰여진 고려사,고려사절요의

공정성이 말이죠.

그래서 오죽하면 조선의 양심적인 신료들과 선비들까지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전체적으로 조작되고 왜곡된 것이 많다라고 인정을 했고 특히 고려말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고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선조때의 재상 윤근수,이덕형이나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나 조선 후기의 송시열과

'동사강목,'을 쓴 실학자 안정복 등의 사람들이 말이죠.

자신이 조선의 신료나 재야의 선비로 있으면서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이렇게 사실과

다르게 조작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이 있다라고 인정을 했고, 또 이것은 현대의

역사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고려사,고려사절요가 전부 다 조작되고 왜곡된 것은 아니겠지요.

분명히 사실들도 많이 있을 것이고 또 고려사,고려사절요는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일차적인 기본 사료인 것은 저도 압니다.

마치 조선왕조실록이 조선을 연구하는 일차적인 기본 사료이듯이 말이죠.

하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든 조선왕조실록이든 권력을 가진 왕과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신료들의 민감한 이해득실 문제 부분에서는 사실과 다르게 조작되고 왜곡된 것이

매우 많은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그 부분을 제대로 밝혀내기 위해서 조선조정의 양심적인 신료들이나 재야의

선비들이 쓴야사들과 시(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소감을 시로써 쓴 것들 말이죠.),

그리고 민간전승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중국 역대 정사책들중에서 가장 첫번째로 인정을 받고 있는 사마천의 '사기.'도

성격을 따지면 분명히 야사입니다.

사마천 당시의 한나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쓴 역사책이 아니고 사마천 자신이

부친의 유언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중국의 시초인 삼황오제 시절부터

(여기에서 한 가지 단서를 달면 사마천은 삼황 시절의 역사는 황당무계하다고

생각을 해서 삼황시대의 역사는 쓰지 않고 오제시절부터 '사기.'를 썼습니다.

지금 사마천의 '사기.'에 삼황본기가 있는 것은 당나라 때 어느 한 학자의

삼황본기를 후대 사람이 첨가를 한 것입니다.)

자신이 실제 살고 있는 한무제 시대까지를 각종 사료수집과 현장답사, 그리고

관련자들과 관련자들의 후손들을 만나 증언까지 듣고 쓴 조선의 '연려실기술.'처럼

야사이지요.

만약에 사마천의 '사기.'가 당시 한나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쓰여진 관찬사서라면

한고조 유방이 항우와의 어떤 한 전쟁에서 패해서 급히 수레를 타고 도망을 가는데,

도중에 한고조 자신의 아들,딸인 한나라 2대 황제가 되는 혜제와 노원공주를 만나서

이들을 태우고 갔는데 수레의 속도는 느려지고 뒤에서 쫓아오는 항우의 추격군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자 다급해진 한고조 유방은 혜제와 노원공주를 발로 차서

수레밖으로 떨어뜨리고 갔고 이에 당시 한고조를 호위하던 한고조의 명장중 하나인

하후영은 혜제와 노원공주를 다시 한고조의 수레에 태웠고 이에 유방은 다시 혜제와

노원공주를 발로 차서 수레밖으로 떨어뜨리고 하후영은 다시 혜제와 노원공주를 다시

한고조의 수레에 태우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을 했고 이에 한고조가 화를 내자

하후영도 화가 나서 어린 혜제와 노원공주를 수레밖으로 내몬다고 해서 수레가

더 빨리갈 것 같냐고 하면서, 그리고 아버지가 어찌 저 혼자 살자고 자식들을

버릴 수 있냐고 따졌고 이에 한고조는 화가 나서

하후영을 죽일려고 까지 했지만 결국은 하후영의 강경한 뜻에 설득이 되어서 결국에는

자신의 수레에 혜제와 노원공주를 태우고 도망을 갔고 결국 항우의 추격병에게서

벗어났다라는 이야기가 쓰일 수 있었겠습니까?

한나라를 건국한 태조인 유방의 이렇게 썩어빠진 면모를 말이죠.

조선왕조실록처럼 한나라에서 한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쓰여진 관찬사서라면

당연히 이런 부분들을 모두 혹은 대부분 삭제를 했겠지요.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는 야사이기 때문에 한나라의 황제와 또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신료들의 눈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에 한고조 유방의 이런

추잡한 모습도 사실대로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이든 아니면 고려인의 문집인 목은집,포은집,도은집이나

원천석의 '야사.'나 기타 고려인에 의해서 쓰여진 고려시대의 역사책이나 문집같은

야사도 무조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이런 내용들이 조정에

알려지면 죽을 각오도 해야하고, 또 심한 경우는 자신의 가족,친척까지 모두

다 죽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세조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사육신들의 행적을 당시와 후세에

올바로 전하기 위해서 사육신들의 행적에 대한 자료들과 관련자들의 증언들을

수집해서 사육신에 관한 전기인 '육신전.'을 만들었을 때 그의 제자들은 이 책을 쓰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만약에 조정에 알려지면,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 된다고 말이죠.

즉 자신들의 스승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렸지만 남효온은 내 한 목숨 아끼기 위해서

충신들의 올곧은 모습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어찌 마다하겠냐고 하면서 '육신전.'을

쓰는 것을 강행했고 그걸 민간에서 인쇄하고 돌려서 사육신들의 단종복위 운동 당시의

행적들이 제대로 후세에 전해진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육신들에 대한 야사인 이 '육신전.'은 숙종때 사육신들이 공식적으로 복권이 되는

중요한 기본자료가 되었습니다.

님께서는 야사가 무조건 관찬사서보다 정확성이나 공정성이 떨어진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물론 기록의 방대함이나 정확성은 관찬사서가 야사보다 아무래도 낫겠지요.

그러나 야사는 최소한 공정성면에서는 관찬사서보다 더 나은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세조에 대한 관찬사서의 기록은 단종실록이나 세조실록에서 김종서,황보인,사육신,

안평대군,금성대군 같은 단종의 충신들이 공정하게 기록이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당연히 당시의 왕인 세조와 그의 아들인 예종의 눈치와 세조와 예종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정인지,신숙주,한명회,권람 같은 권신들이 그걸 용납할리가 없고

(설령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쓰는 사관들이 목숨을 걸고 양심적으로 공정하게

쓸려고 해도 말이죠.)또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은 세조를 따르는 사람들이 쓴 것이니

그래서 공정성면에서는 원천적으로 공정하게 쓸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이에 비해서 야사인 '육신전.'은 어떻습니까?

관찬사서인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권력의 눈치에서 자유롭고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결코 아니죠.

어차리 남효온의 '육신전.'의 경우 이 내용이 조정에 알려지면 남효온과 그의

가족,친척들은 모두 죽을 각오를 해야하니 말이죠.)또 야사를 쓰는 사람이

제대로 된 양심을 가지고 공정하게 쓸려고 한다면 관찬사서들에 비해서 훨씬

공정하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남효온은 강한 양심을 가지고 비록 사육신들이 단종을 복위시킬려는

충절은 지극히 훌륭하지만 애초에 사육신들이 단종복위운동을 하지 말고

조정에서 물러나서 조용히 살았으면, 단종도 살고, 사육신들도 살고,

또 세조도 자신의 치세가 더럽혀지지 않고(세조가 아무리 많은 정치적 업적을

남겼어도 김종서,황보인,사육신,안평대군,금성대군등의 단종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충신들을 대량으로 학살했기 때문에 조정의 양심적인 신료들과 선비들과

백성들에게 이미지가 나빠져서 폭군으로 그 이름이 더럽혀지고 세조의 정치적

업적들도 빛이 바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옛날 사회라고 해서 꼭 정치적

업적이 많아야만 훌륭한 지도자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지요. 인명을 소중히

여기고 가급적이면 형벌과 처형을 줄이고 안해야 사람들에게 훌륭한 지도자라고

인정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조선의 세조와 중국 명나라의 주원장은

정치적 업적은 많아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학살해서 현군,혹은

성군이라는 소리를 못 듣고 능력은 뛰어나지만, 잔인한 폭군으로 매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사육신을

비판을 했고, 또 사육신중의 한 사람이고 사육신의 유일한 무신인

유응부의 발언을 빌려서 사육신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했을 때 사육신의

핵심 멤버인 성삼문,박팽년이 너무 이것저것 많이 생각을 해서 과감하게 행동을

해야 할 때 행동을 하지 못하고 세조와 그를 따르는 권신들의 암살을 뒤로

미루어서(애초의 예상과 달리 상황이 상당히 나빠졌기 때문에.

이때 사육신의 유일한 무신인 유응부는 상황이 애초에 비해서 다소

나빠졌지만 그래도 결정적으로 실패할 정도는 아니니 처음의 계획대로

과감하게 세조와 그를 따르는 권신들을 죽여야 한다라고 하면서

만약에 이대로 계획을 미루면, 비밀이 새어나가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의 강력한 반대때문에 결국 세조와

그를 따르는 권신들에 대한 암살계획은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고,

이런 사태의 흐름을 보면서 애초에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했던 한 사람인

김질은 이미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했다라고 단정을 해서 자신만이라도

살려는 목적으로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운동을 세조에게 알려서

결국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했고 국문장에서 유응부는 성삼문과

박팽년에게 애초에 내 말대로 했으면 이렇게 실패하지 않았을텐데

너희들 때문에 실패를 했다라고 하면서 머리가 나쁜 너희들은 짐승과

무엇이 다르냐고 신랄한 비판을 한 이야기를 그대로 썼습니다.)

사육신의 핵심 멤버인 성상문,박팽년이 계획을 잘못 짰기

때문에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한 것이라고 쓰기도 했고, 또

사육신이 체포가 되어서 고문을 당할 때 성삼문,이개,유응부는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태연자약했다고 적었지만 박팽년,하위지는 그렇게 쓰지 않았습니다.

즉 성삼문,이개,유응부는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태연자약했는데 박팽년,

하위지는 고문을 당하면서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했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죠. 남효온이 애초에 사육신들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

'육신전.'을 썼으니 만약에 공정성과 정확성을 엄격히 따지지 않았다면,

성삼문,이개,유응부 뿐만이 아니라 박팽년,하위지도 고문을 당하면서도

태연자약했다라고 거짓되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사육신중에서 유일하게 체포가 되어서 국문장에 가지 않은 유성원의

경우는 일이 이미 실패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자살을 했다라고

적지도 않았겠지요. 그냥 유성원도 체포가 되어서 국문장에서 끌려가서

다른 다섯명의 사람들과 똑같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절의를 굽히지

않았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태연자약했다라는 식으로 거짓되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위에서 이미 이야기를 했듯이 사육신들이 애초에 단종복위 운동을

하지 말고 조정에서 물러나서 조용히 살았어야 했다라고 비판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단종복위 계획을 세우면서 핵심 멤버인 성삼문,박팽년이

계획을 제대로 짜지 못해서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했다라고 사육신중

유일한 무신인 유응부의 발언도 기록을 했고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남효온의 '육신전.'은 사육신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쓴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쓴 것인지 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사육신들의 단점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지적을 하지 않았습니까?

남효온이 말이죠.

또 사마천의 '사기.' 경우 사마천의 공자에 대한 전기인 공자세가를 쓰면서

공자가 제나라에 가서 제나라 군주에게 유세를 해서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면서

자신을 등용해 달라는 이야기를 했고 이에 제나라 군주는 공자의 사상에

매료가 되어서 공자를 기용할려고 했지만 당시 제나라 재상인 안평중은

공자의 사상의 문제점들을 신랄하게 조목조목 비판을 했다라고 썼습니다.

여러가지인데, 일단 유학자는 자신이 대유학자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거만해서

아랫사람으로 부리기가 어렵고 또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지나치게 해서

심지어 파산까지 해가면서 죽은 사람에 대한 성대한 장례를 치르도록 하니

이것을 국가의 제도로 쓸 수 없고 또, 공자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도덕적이어서 지금 현실적으로 모든 제나라의 신료들과 선비들과 백성들에게

적용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공자의 사상들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했고 이에 대해서 공자는 안평중의 비판에 대해서 반론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당시 제나라 군주는 공자를 등용할려는 계획을

취소했다라는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사마천은 공자세가를 쓰면서 공자는 최고의 성인이라고 극찬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안평중의 공자의 사상의 문제점들을 신랄하게 지적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썼고 또 공자는 여기에 대해서 반론을 하지 못했다는

것도 역시 썼고 또 공자가 말년에 역사책인 '춘추.'를 쓰면서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정의는 무조건 이긴다.'라는 자신의 신념대로 써서

실제 사실을 많이 조작,왜곡한 것도 지적을 했습니다.

공자의 이런 '춘추.'의 집필 태도에 대해서 공자의 제자들조차

이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고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공자가 죽기 몇일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한 이야기도 그대로 썼지요.

공자의 경우 그야말로 성인인데 성인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성인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적어도 성인군자나 위인이나 영웅쯤 되면 자신의 죽음 정도는

초개나 홍모{새털.}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태연해야 하는 것이 성인군자나

위인이나 영웅에 어울리는 모습이니 말이죠.)공자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극찬한 사마천은 이걸 그대로 공자세가에 썼습니다.

이렇다면, 사마천이 공자세가를 쓴 것이 공자를 소위 띄울려고 쓴 것인지,

아니면 깎아내릴려고 쓴 것인지, 구분이 안 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래서 사마천의 '사기.'의 공자세가는 후세의 유학자들과

관리들과 선비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사마천은 자신은 공자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극찬을 했지만 그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공자의 단점들을 있는 그대로 쓴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조선의 대표적인 야사모음집인 '연려실기술.'도 이런 식으로

최대한 공정하고 정확하게 쓸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말이죠.

그래서 '연려실기술.'의 경우 저자인 이긍익이 조선시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일체 언급이 안 된 금기인 '함흥차사.' 사건도

있는 그대로 쓴 것이고, 또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오는 척을

하면서 이를 마중나간 태종 이방원을 두 차례에 걸쳐서 죽일려고

하다가 실패한 것도 있는 그대로 쓴 것이고, 단종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신숙주와 정인지의 전기도 써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할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긍익이 공정성이 없는 인물이었다면 자신이 못 마땅하게

여기는 역적인 신숙주와 정인지의 전기를 쓰지 않았겠지요.

이렇게 야사는 관찬사서에 비해서 쓰는 사람이 정말로 공정하게 쓸려고

마음을 먹으면 공정하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분들은 몰라도 적어도 야사는 제대로 된 역사책이라면

공정성면에서는 관찬사서보다 훨씬 나은 부분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생각을 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기록의 방대함이나 정확성은 아무래도 관찬사서가

야사보다 낫겠지만, 적어도 공정성만큼은 쓰는 사람의 정직성 여하에

따라서 야사가 관찬사서보다 훨씬 낫다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관찬사서를 연구하는 현대의 역사학자들중에서 삼국사기나 고려사,

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등의 관찬사서들이 공정성 면에서 100%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책들을 그 당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1차적인 기본자료로서 존중은

하지만 그 관찬사서들중에서 많은 부분이 정확성면에서 문제가 있어서

부정확하게 기록이 되거나, 또 애초에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아서 고의로

사실과 다르게 조작,왜곡해서 쓴 것들이 많다라는 것도 다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래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까?

그 관찬사서들중에서 어떤 부분들이 부정확하게 기록이 되었는지, 어떤

부분들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아서 사실과 다르게 조작,왜곡이 되었는지,

또 어떤 부분들이 기록이 되었어야 하는데 빠졌는지등을 연구하자니

말이죠. 관찬사서들이 정확성면에서나 공정성면에서 무조건 100%

다 올바르다면 근본적으로 역사학자들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요.

관찬사서들만 다 보면 되니까 말이죠.

이런 경우, 한자로 된 관찬사서들을 번역을 할 번역가만 필요하지,

이 관찬서서들이 어떤 부분이 올바르게 기록이 되었는지, 또 어떤 부분들이

잘못 기록이 되거나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아서 사실과 다르게 조작되고

왜곡되었는지, 또 어떤 부분들이 기록이 되었어야 하는데 빠졌는지에

대해서 연구를 할 역사학자들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기본적으로 말이죠.

이런 것들을 잘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으로 님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 같은

고려시대를 다룬 조선의 관찬사서들이 정말로 조작이 되었다면 왜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확실하게 조작을 하지 않고 조작이 의심되는 표현을 남겼겠냐고

하셨는데요.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역사를 완벽하게 조작을 하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치면 현대의 범죄자들, 왜 거의 다 결국 경찰에

잡힙니까? 완벽하게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가 매우 힘들어서 결국 거의 다

경찰에 잡히는 것이 아닙니까?

역사의 조작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경우도 있겠지요. 고려의 황제나 왕과 신료들과 재야의 선비들에

대한 기록을 쓸 때 예를 들어서 고려후기와 고려말의 인물들에 대해서 세가(고려의

황제와 왕의 일대기를 말함.)와 열전(일반 신료들과 재야의 선비나 기타 인물등의

전기.)을 쓸 때 그 인물이 고려후기와 말기의 인물이라고 해서 조선왕조 건국의

합리화를 위해서 무조건 나쁘게만 쓴다면(고려 후기와 말기로 가면서 고려가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적으로 크게 쇠퇴해서 결국 수습을 할 수 없는 국면이

되어서 백성을 위해서는 조선왕조 건국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라는 조선왕조

창업의 정당화를 위해서.),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좋은 면들도

불가피하게 써야했을 것입니다. 고려 후기나 말기의 인물들을 무조건 나쁘게만

쓰면 이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원래 거짓말이라는 것이 진실과 거짓을 혼합해야

사람들이 잘 믿기 때문에 말이죠.

그리고 다음으로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조선의 왕의 명령으로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를 쓰는 담당자들이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고려의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나쁜 쪽으로 조작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조작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해서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고려사,고려사절요를 쓰면서 일부러 조작을 허술하게 해서 후대의 사람들이

진실을 추측해서 알 수 있도록 조치를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 이런 글이 있지요.

우왕이 최영의 딸인 영비를 지키기 위해서 왕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다음에,

차기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조정에서 의논이 있었을 때 이성계 측과는 달리

조민수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왕을 앉히기 위해서 목은 이색에게 차기 왕은

누구로 정했으면 하냐고 물었고 이색은 이에 마땅히 전 왕의 아들을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고 이에 조정의 논의를 거쳐서 창왕이 우왕 다음의 왕으로 정해졌다라고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고 조선의 양심적인 신료들과 선비들이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아들이

아니라 공민왕의 아들,자손이라는 것을 알겠다고 한 것입니다.

정말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자손이라면 당연히 당시의 왕족인 왕씨 중에서

한 명을 골라서 왕으로 세우자고 해야 하는데(조민수가 당시 이성계 측과 대립을

하고 있었고 이때는 조민수가 이성계보다 발원권이 더 강했습니다.

실제로 위화도 회군이 막 성공한 직후 우왕은 조민수를 좌시중에, 이성계를 우시중에

삼아서 조민수가 이성계보다 더 위에 섰습니다.

이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위화도 회군을 한 후, 이성계와 조민수는 개성에서 최영의 군대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치면 당시 이성계와 조민수는 당시 고려의 군대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쉽게 최영을 제거할 수 있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나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나옵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를 보면 처음 6월 1일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최영이 지키는

개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공격을 했는데 먼저 이성계는 자신의 부하인 유만수와

또 다른 부하 장군을 보내서 당시 개성의 두 개의 성문쪽으로 공격해 들어갔는데

최영이 이를 맞아서 싸워 모두 물리쳤다고 나옵니다. 기록에는 안 나오지만,

이때 조민수도 자신의 부하장군들을 보내서 나머지 개성의 문들을 향해서 공격을

했겠지요. 물론 조민수의 부하장군들도 모두 최영에게 패배를 당했겠지요.

이후 이성계와 조민수 본인이 직접 나서게 되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는

이성계가 최영의 부하장군인 안소쪽이 지키는 성문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조민수는

최영이 지키는 성문쪽으로 들어가게 했고 조민수는 최영에게 패배하고, 안소는

이성계의 군대와 마주치자 기에 눌려서 싸워 볼 생각도 못하고 도주를 했다고

나옵니다.

이후에 최영이 어떻게 패배를 해서 우왕과 자신의 딸인 영비 최씨가 있는 궁전의

화원으로 도망을 가서 거기서 체포가 되어서 귀양을 가게 되었는지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와 고려사,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 말이죠.

그리고 이후에 이성계는 분명히 조민수보다는 명장임에도 불구하고 우왕은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임명하고 이성계를 우시중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또 얼마 뒤 우왕이 영비 최씨를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왕자리에서 물러나자

이성계측의 바람과는 달리 조민수의 의견이 채책이 되어서 우왕의 아들 창왕이

차기 고려의 왕이 되고 말이죠.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매우 수상하지요? 기록이 말이죠.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입니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이성계와 조민수의 부하장군들이 개성의 여러 성문쪽을

공격했다가 모두 최영에게 패배하자 본인들이 직접 나섰고, 그리고 이때

이성계가 당연히 최영 쪽을 맡았을 것이고, 조민수는 안소쪽을 맡았겠지요.

그런데 이성계는 최영과 대결을 해서 최영에게 패배를 하고 있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계가 궁지에 몰려 있는데, 조민수는 안소를 격파하고

이성계를 구원하기 위해서 달려왔을 것이고 이때 최영은 자신이 가진

군사의 수가 너무 적은데다가, 이성계와 조민수의 협공을 받게 되어서

패배를 했겠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최영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도

거의 100%에 가깝게 패할 수 밖에 없겠지요.

손자나 제갈양이나 이순신 장군같은 사람이라도 말이죠.

하지만 최영은 워낙에 뛰어난 무예실력이 있었으니,

{홍산대첩에서는 순전히 아무 작전도 없이 최영 한 사람의 초인적인

전투력으로 왜구를 완전히 격파를 했지요. 홍산대첩때 왜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은 3면이 절벽이고 한 면만 길인데 그 길을 왜구가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고 그래서 최영의 군사들이 진격을 못하자 이때 61세의 최영은

자신이 선두에 서서 왜구들을 격파하기 시작했고 그 기세가 워낙에

대단해 왜구들은 바람앞에 풀잎 쓰러지듯 무너졌다고 고려사 최영전에

나오지요. 이때 한 왜구가 숲에 숨어서 최영을 활로 쏘았고 화살은

최영의 입술에 맞았지만, 최영은 태연자약했고 얼른 사방을 둘러보고

자신을 쏜 그 왜구를 찾아내서 활로 쏘아 죽이고 그 다음에 화살을

뽑았고 이에 피가 발꿈치까지 흘렀지만 오히려 처음보다 더 용감히

적을 몰아붙여서 이에 사기가 오른 최영의 군대들이 앞다투어 진격을

해서 결국 왜구를 전멸시킨 것입니다.}이성계와 조민수 군의 포위를

뚫고 우왕과 자신의 딸인 영비 최씨가 있는 궁전의 화원으로 가서

숨었고,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군은 화원을 뒤져서 최영을 찾아내서

체포해서 고봉현으로 귀양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게 진짜 개성에서의 이성계,조민수 군과 최영군의 전투의 실상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당연히 이성계보다 조민수가 훨씬 더 발언권이

세졌을 것이고 그래서 우왕은 조민수를 좌시중에, 이성계를 우시중에

봉했을 것이고, 그래서 얼마 뒤 우왕이 물러나고 나서, 차기 왕을

누구로 할지 조정에서 의논이 있었을 때도 이성계 측의 의견을 제끼고

조민수가 이색과 다른 고려에 충성하는 신하들과 연합해서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세웠을 것입니다.)

조민수는 차기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왜 이색에게

물었으며, 이색은 왜 마땅히 전 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했고

여기에 조정의 신료들의 동의를 해서 창왕이 우왕 다음의 고려의 왕으로

즉위를 했겠냐고 하면서 그래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 아님을

알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원천석의 '야사.' 6권 말인데요.

원천석은 '야사.' 6권만 쓴 것이 아닙니다.

'운곡시사.'라는 시집에서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전번의 글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태도를 가진 원천석이

조선의 고려말 역사 왜곡에 대해서 대항하기 위해서 말년에 '야사.' 6권을

써서 정말로 올바른 고려말의 역사를 후세에 전할려고 했고 이 책의 내용을

원천석의 증손자들이 보고 기존의 조선의 조정에서 선전하는 고려말의 역사와

자신들의 조상이 쓴 '야사.'와는 내용이 많이 혹은 대부분 맞지가 않아서

이것이 조선조정에 알려지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책을 모두 없앴다는 것에 대해서 님은 이의를 제기하셨는데요. 거기에 대한

답은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워서 자신들의 조상의 책을 모두 다 없앴지만, 나중에

후회를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라고 말이죠.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죄책감과 비겁함을 후회해서 말이죠.

그래서 원천석의 '야사.'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과 후대에 알려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라고 말이죠.

그리고 다음으로 포은 선생은 이성계에 대해서 1392년 이전까지 탄핵을

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물론 1392년 이전까지는 그랬겠지요.

하지만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면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육신의 경우와 비교를 하면 말이죠.

사육신도 세조가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정권을 잡고 결국 나중에는

단종까지 몰아내고 왕으로 즉위를 했지만, 세조가 애초에 김종서와

황보인을 불법적으로 죽이고 정권을 잡고 또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단종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정치를 하고 또 단종을 몰아낼려는 음모를

꾸몄을 때 침묵했습니다.

심지어 단종이 세조에게 강제로 양위를 당할 때도 눈물만 흘리고 울기만

했지,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조가 김종서와 황보인을 불법적으로 죽이고 정권을 잡고 또 단종을

무시하면서 마음대로 정치를 하고, 또 결국 나중에는 단종까지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현장에서도 침묵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결정적인 기회를 노릴려는 의도가 아니었겠습니까?

사육신이 세조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에 단종에게 세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죽겠지요. 안 그렇겠습니까?

자신들이 죽으면 단종은 누가 지키겠습니까?

그러니 결정적인 기회가 올 때까지 침묵하고 기다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포은 선생도 이런 의도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1392년 이전에 이성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면 아무리 포은 선생이

이성계의 각별한 총애를 입고 있어도 화를 면하기는 어렵지요.

그 당시 고려의 상황을 보십시오.

이색,이숭인 같은 고려의 충신들은 거의 전부가 이성계의 의해서

고문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는 고려조정의 비중있는 충신은 포은 선생밖에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포은 선생이 아무 대책도 없이 공개적으로 이성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면 포은 선생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자신마저 죽는다면 고려왕조는 누가 지킨다는 말입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사육신의 경우처럼 포은 선생도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것입니다.

기회를 기다리다가 마치 이성계가 해주에 나가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자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이색,이숭인,김진양등의

고려 충신들과 발빠르게 움직여서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탄핵하고

죽일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포은 선생은 고려사의 기록만 보아도 1392년 이전에 현재의 자신의

위치에서 이색,이숭인, 기타 고려측 충신들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보호할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것은 님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요. 고려말의 4명의 왕인 경효왕(공민왕.),우왕,

창왕,공양왕. 이 4명이 전부 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대로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하다라고 한다면 도대체 포은 선생이 왜

공양왕을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했는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차피 어리석고 정치를 못하기는 경효왕(공민왕.),

우왕,창왕과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그리고 님도 밑의 글에서 이야기를 했듯이 포은 선생의 포은집이나

목은 이색의 목은집,이숭인의 도은집이나 기타 다른 고려 충신들의

문집에서도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행동을 정말로 했다면, 포은 선생의 스승인 목은 이색이나

이숭인 같은 동료나 포은 선생의 후계자인 길재나 원천석이나

기타 다른 고려측 충신들이 포은 선생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이나

욕을 안 할 수 있을까요?

또 포은 선생이 1392년에 이성계의 해주 낙마 사건을 계기로

발빠르게 움직여서 이색,이숭인등과 연합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색과 이숭인은 우왕과 창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헌신적으로

노력했고 그래서 고문을 당하고 귀양도 가고 했는데 말이죠.

포은 선생이 정말로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면 이성계의 해주 낙마 사건같은

좋은 기회가 있었어도 이렇게 쉽게 발빠르게 연합을 할 수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포은 선생이 아무리 그전에 이색과 이숭인을 보호할려고 많이 노력을

했다고 해도 포은 선생이 1392년에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해서

다친 것을 계기로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고 죽어야 한다고

이색과 이숭인등에게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너는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은 놈이 아니냐고

따지면서 포은선생과 매우 발빠르게 연합하는데 실패했을 것입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와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등의 기록을 보아도

포은 선생이 1392년에 이성계의 해주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죽일려고 했을 때 이색,이숭인등의

소위 '우창당.'(우왕과 창왕을 보호할려고 노력한 사람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 갈등도

안 겪고 매우 쉽고 발빠르게 뜻이 모아질 수 있을까요? 포은 선생이 정말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면 말이죠.

아무리 포은선생이 평소에 이색과 이숭인을 보호하는데 각별히 노력을

했어도 말이죠. 그들은 명색이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인데 포은 선생이

단지 자신들을 평소에 보호해 주었다는 사적인 은혜만 가지고 그렇게 쉽고 빠르게

포은 선생의 이성계 세력 제거 계획에 의기투합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연려실기술을 보면 태조조 고사본말의 소제목중 하나인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 라는 제목에서 포은 선생의 사주를 받아서

정도전,조준등을 탄핵하는데 핵심적 역활을 했던 김진양에 대한 글을 보면 이렇습니다.


김진양(金震陽)


김진양은, 자는 자정(子靜)이며, 본관은 계림이다.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 공은 고려조의 충신이다. 그가 정도전을 탄핵한 소에 말하기를,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하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한다는 것은 우왕과 창왕 부자를 말한 것이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는 것은 이색 등 여러 대부를 말한다.

만일 공의 말대로 정도전에게 죄를 주어 죽였더라면

고려의 멸망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가 들어감에 이것을 그냥 두었다가 복합(伏閤)을 한 뒤에 겨우 조정에

내 놓았다가 다시 들여 갔으니,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이 대목을 볼 때에 기가 막히게

한다. 《상촌집》



이상입니다.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고 하면 1392년에 포은 선생의 사주를 받아서 정도전,조준 등을

탄핵하는데 핵심적인 역활을 한 김진양이 어떻게 이런 상소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자손이 아니고 왕씨라는 것은 조선의 양심적인

신료들이나 선비들이 모두 다 인정했던 사실이고 지금 현대의 역사학자들도 거의 모두가

인정하는 정설입니다.

님께서 포은 선생의 후손이라고 해서, 또 님이 포은 선생이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그래서 그 댓가로 공신의 지위까지 받았다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나 고려사,고려사절요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믿는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억지로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자손으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에 그런 의도라면 말이죠. 아니라면 죄송하고 말이죠.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자손이라는 주장을 하신다면 그야말로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것은 제가 이미 전의 글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우왕과 창왕이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한 군주라면 어째서 이성계 세력이 애초에 우왕을 폐위하고

죽였을 때 내세운 주된 명분이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웠겠습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냥 우왕과 창왕이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해서 폐위를 했다고 하면 될 것을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실제로는 우왕이 어질고 현명한 왕이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한 왕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우왕을 폐위시킬 명분이 부족했던 이성계

세력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자손이라고 조작해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죽인 것입니다.

우왕과 창왕이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했다라는 기록은 나중에 후세의 사람들을

미혹시키기 위해서 추가로 만들어낸 기록이고 우왕이 살아있는 당시에는 우왕이

포악하고 어리석고 방탕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우왕을 폐위시킬 명분이 없는 이성계 세력이 궁여지책으로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자손이라고 한 것입니다.

참고로 제가 우왕의 인간됨에 대해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우왕세가를 보니

이런 대목이 2개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대로 올리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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