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 | 연안이씨 종손이 영일정씨 종손을 상대로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소재 산판 415정1반15보에 대하여 산판 공유권 확인청구소송을 제기하였던바, 1914년까지 2년여에 걸친 법정 소송 끝에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복심법원 등에서 기각 판결을 함으로써 소유권은 영일정씨 종손명의로 되었다. |
1919.01 | 종손 의열(義烈)씨는 영일정씨포은공파 종약(宗約)을 제정하여 위토(位土) 보존에 힘썼다. |
1947.02.04 | 영일정씨포은공파 종손(宗孫) 의열(義烈)씨가 타계(他界) 하였다. |
1957.05.26 | 영일정씨종친회 창립총회가 종친 60명이 참석한 가운데 덕수궁 함녕전에서 개최되었다. 회칙 제정과 임원 선출이 있었는데 회장에 원화(元和), 부회장에 봉화(鳳和:포천공파), 감사에 대화(大和), 봉화(鳳和:별좌공파), 종친이 선임되었다. |
1957.08.15 | 영일정씨문충공 포은선생파 종약원 설립을 발기하고 같은 해 음 10.1일 영모재 시사때 창립총회를 개최키로 하였으나 창립총회 개최기록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
1960.05 | 영일정씨문충공파보(庚子譜)가 1957.7.1일 영모재에서 대종회를 개최하여 간행할 것을 발의한 후, 대종회 회장인 원화 종친이 도청(都廳)으로 선출되었으며, 파보소(派譜所)에서는 보규(譜規)를 첨부하여 각파 종친들에게 통문(通文)을 발송한 후 3년여 각고 끝에 全4卷으로 간행되었으며, 서문(序文)은 원화 종친이, 발문(跋文)은 연국(然國)종친이 적었다. |
1965.10.01(음) | 영모재(永慕齋) 창립총회를「포은선생 묘소와 유물의 보존, 제전(祭奠) 봉향(奉享)의 충실과 재산영구보존」을 목적으로 하여 개최하였으며, 이사장에 석영(奭永)종친이 선임되었다. |
1965. |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삼은각에 1394년 포은 정몽주선생을 배향한 후 이어서 이목은, 길야은 선생을 배향하여 세분 선생을 500여년 간 향사하여 오다가 1940년에 목은 후손 이조원이 목은선생을 수위로 포은선생을 차위로 길야은선생을 삼위로 봉안한 이후 춘·추 향사때마다 위차문제가 논의되어 오던 바 1956년 춘향시에 유림총회 의결에 의하여 포은선생을 수위로 환원 봉안하였으나 1957년 동향시에 목은선생 후손들이 목은선생을 수위로 변경 봉안함으로써 한산이씨측과 숙모회·전국유림·영일정씨포은공파종약원간에 위차분규가 일어나 분쟁이 끊이지 않다가 1965년도에 정상환차되어 포은선생을 수위로 봉안하게 되었다. |
1965.10.01(음) | 영일정씨 문충공파 대종회를 영모재에서 개최하여 문충공 묘소, 묘막 개축의 건에 대하여 심의하였으며, 의장에 원화종친이 선임되었다. |
1966.10.01(음) | 오후 6시 영모재에서 종친 78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일정씨 문충공파 총회를 개최하여 종무원(宗務院)을 결성하고 임원선출 및 정관을 개정했다. 이사장에는 원화(元和), 부이사장에 봉화(鳳和) 종친이 선임되었으며, 18명의 이사와 2명의 간사를 선출하였다. |
1967.10.01(음) | 오후 7시 영모재에서 영일정씨문충공파 대종중회를 개최하고 창수(彰洙)종친과 철용(喆鎔)유사와의 분쟁해결 건과 남성재(南城齋), 계현재(啓賢齋)에 종파(宗派) 대표 참사(參祀)건에 대하여 심의하였다. |
1970.10.01(음) | 오전 10시 영모재에서 종친 69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일정씨 문충공파 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선출과 정관을 일부 개정하였다. 종약원 전 제2대 이사장에 석영(奭永)종친이, 총무에는 연설(然卨) 종친이 선임되었다. |
1972.05.04(음) | 포은선생 묘역이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호(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1973.10.01(음) | 오전 10시 영모재에서 종친 121명이 참석한 가운데 1973년도 종중정기총회를 개최하고 감사보고와 임원선출이 있었는데 종약원 전 제3대 이사장에 석영(奭永)종친이 중임되었다. |
1974.10.01(음) | 영모재에서 종친 22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74년도 종약원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수호인(守護人) 개임(改任)의 건 외 6건을 심의 의결하였다. |
1975.07.10 | 재경종친회가 발족되었다. |
1975. | 재경종친회(회장 해영, 총무 연관)에서는 성균관과 협의하여 영모교 입구 하마비(下馬碑) 옆에 포은 시비(圃隱 詩碑=단심가비)를 세웠다. 비문은 성균관 총무처장 강정희(姜貞熙)씨가 쓰고 영동석물원 신대완(申大完)씨가 조각하였다. |
1976.02.17 | 종약원 발족전에 이사장으로 재임중 경자보(庚子譜) 간행을 비롯하여 종중발전에 크게 공헌한 원화(元和) 종친이 타계(他界)하였다. |
1976.07.11 | 종약원 발족전에 이사장으로 재임중 포은선생묘소보완사업을 비롯하여 종중발전에 크게 공헌한 석영(奭永)종친이 타계(他界)하였다. |
1976.10.01(음) | 영모재에서 종친 152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일정씨 포은공파 종약원 1976년도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경과보고와 임원 개선이 있었는데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해영(海永) 종친이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
1978.10.01(음) | 오전 10시에 영모재에서 종친 242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일정씨포은공파 종회 1978년도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재산일원화, 묘역정화사업, 영일정씨세보 간행 등 6건의 안건을 심의 의결 하였다. |
1979.10.01(음) | 오전 9시 40분 영모재에서 종친 370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일정씨포은공파 종약원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영일정씨세보 간행추진, 묘역정화사업, 종중재산 일부정리 활용의 건 등 6건의 안건을 심의 의결하였다. |
1980.04.24 | 종중의 주요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각 업무에 대한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각 소위원회의 위원을 선출하였다. 1. 제전소위원회(祭奠小委員會) : 위원 5명 2. 종재관리소위원회(宗財管理小委員會) : 위원 7명 3. 묘역정화사업소위원회(墓域淨化事業小委員會) : 위원 5명 |
1980.10.01(음) | 오전 10시 영모재에서 종친 490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일정씨 포은공파 종약원 1980년도 총회를 개최하고 1980년도 결산및 1981년도 예산심의와 임원개선이 있었으나 임원개선의 건은 심의하지 못하였다. |
1981. | 영일정씨세보(迎日鄭氏世譜=辛酉譜)가 1977년 영일정씨 대종회와 1978.10.1일 영일정씨 포은공파 종약원 총회에서 세보간행 결의가 있은 후 서울 동마장 소재 빌딩 4층에 보청(譜聽)을 설치하고 당시 이사장이었던 해영(海永)종친이 보청 총재로 선임이 되어 3년여에 걸쳐 간행사업이 진행된 후 1981년(辛酉)에 총 12권으로 간행되었으며 서문은 영일정씨 대종회장 겸 영일정씨세보총재인 해영(海永)종친이 썼고 또 하나의 서문은 전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장 승화(昇和)종친의 근지(謹識)로 되어 있다. |
1981.10.01(음) | 영모재에서 종친 약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일정씨 포은공파종약원 총회를 개최하고 이사 선출, 정관개정, 파보청 수지예산에 대하여 심의 의결하였다. 종약원 초대 이사장에 해영(海永)종친이 선임되었다. |
1982.09.09 | 서울시 광진구 군자동 91-13,14번지에 소재한 대지 96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 연면적 186평을 1억1천55만9천7백19원으로 매입하여 "포은빌딩" 이라 칭(稱)하고 최초로 종약원사무실을 마련하였으며, 연간 1천여만원의 임대 수입으로 종약원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