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곡선조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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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연일(kma37e@hanmail.net)작성일2025-02-12조회수1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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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족보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본바에 의하면, 포은 정몽주 선조께서는 1392년에 4둴4일 56세의 나이에 억울하게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 26세) 의 부하들에 의하여 돌아가시고 난후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 일당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1392년7월17일에 건국하게 되었음.. 정몽주선조님의 동생인 정과(예조판서), 정도(사재령?) 형제들도 이후에 참형됨으로서 우리집안은 한순간에 멸문이 될뻔하였음.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정몽주님의 큰아들 정종성(19세), 둘째 정종본(16세)님을 비롯한 후손들은 모두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음. 2. 이후 조선의 임금은 제1대 태조 이성계(재위1392~1398), 제2대 정종, 제3대태조 이방원(재위1400~1418)로 이어질때에 1392년에 돌아가신 정몽주선조께서는 개성근처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어있었는데,. 태조 이방원이가 왕이 된후 1406년 당시 성리학의 대부이신 정몽주선조를 영의정으로 추서하고 후손에게 벼슬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묘지를 후손들의 뜻에 따라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을 허락함. 그리하여 묘지이장을 위한 상여를 준비하여 이동중 만장이 바람에 날려 지금의 용인시 포곡읍 모현리에 떨어져 그곳을 확인해 보니 명당이라고 하여 정몽주선조님의 묘지로 조성하게 되었음. 그후 정몽주선조님의 손자인 정보님의 딸이 남편 연안이씨 이석형(1415~1477)님과 함께 아버지 정보님의 묘지터에 묻히게 되었음. (정보님의 후손들은 200년후 숙종때인 1703년경에 죄인에서 복권이 되었음) 이후 이석형의 가문에서는 고관대작이 많이 배출되었고, 이석형 묘지 아래로 그후손들이 묘지를 많이 사용하였음으나, 정몽주묘지 성역화 사업으로 모두 이장을 하였고 이석형 묘지만 남아 있음. 3. 그리고 1703년 숙종임금은 성리학자와 사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용인시 포곡읍 모현리 일대 약210만평의 토지를 영일정씨 포은공파후손에게 사폐지로 하사하고 산지기5인을 두어 관리하게함. 그리하여 이전에 불법으로 조성된 타성씨의 묘지들은 이후 하나씩 이장을 하게 되었음. 최종적으로는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포은 선생 묘지일 성역화사업으로 타씨성의 묘지는 모두 정리를 하였음. 4. 설곡정보 선조님에 대하여 알아보면, 정보선조님은 정몽주선조님의 장손자임. 즉 정종성님의 큰아들임. 태종 이방원이의 아들 세종(재위1418~1450)이 조선의 제4대임금이 되었을때, 설곡정보 선조님도 세종과 비슷한 나이 였다고 추정됨. 세종은1397년생, 정보선조는 1390년생임. 정보선조는 세종의 큰아들 문종이 일찍 죽자 문종의아들 단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 이때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1453년에 조카단종을 폐위시키고 제7대 왕이되었음. 이때 조정에서는 성삼문,박팽년등이 단종복위를 위한 역모가 꾀하다가 발각되어 성삼문등 사육신이 처형될때에, 정보선조께서 사육신의 처형을 반대하시다가 같이 역모로 몰렸으나, 정몽주님의 손자라는 이유로 사형은 면하고 경남산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산청에서 돌아가셨음. 정보선조님은 약200년후 복권이 되었고, 묘지도 경남 산청에서 용인 선산으로 이장하게 되었음(정몽주 선조님 우측능선에 있음) 5. 다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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